AI 시대의 서늘한 경고
이 영화의 로그라인은 매우 간단하다. 제지공장에서 25년 일한 제지 전문 기술자인 주인공이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한다. 그는 재취업을 하기 위해 잠재적 경쟁자인 제지 기술자들을 한 명씩 찾아다니며 죽인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해고당한 노동자가 자신을 자른 자본가가 아니라 경쟁자인 다른 노동자들을 죽인다는 설정은, 약자들끼리의 살벌한 생존게임을 통해 이 잔혹하고 서글픈 자본주의 사회를 고발한다는 것. 그래서 당연하게도 이 영화는 블랙코미디 장르로 갈 수밖에 없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의 호불호가 엇갈린다. 대체로 호평보다는 혹평이 더 많은 것 같다. 주인공 만수의 살인 행각에 공감을 못 하겠다는 것이다. 비록 실직했지만 만수의 처지가 살인을 해야 할 만큼 절박해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어쩔 수 없지 않다’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우리가 관객의 안쓰러운 감정에 호소하는 TV 드라마나 영화들에 익숙해서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을 거의 길바닥에 나앉는 수준 정도로 코너에 몰아넣어서 연쇄 살인의 타당성과 개연성을 만들어줘야 관객들은 공감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 만수는 누가 봐도 그만하면 괜찮은 중산층의 모습을 갖고 있다. 테니스와 댄스파티를 즐기러 다니는 아내, 첼로를 켜는 딸, 결정적으로 넓고 번듯한 정원이 딸린 집(이 대목에서 감독은 지방의 마당 있는 단독주택은 서울의 아파트보다 훨씬 싸다고 해명한다).
비슷한 결의 영화 <기생충>과 비교하면 단박에 이해가 될 것이다. <기생충>의 주인공 가족은 더 떨어질 곳도 없는 반지하방에 사는 빈곤층이다. 그래서 그가 코너에 몰려 부유층인 사장을 우발적으로 죽이는 것을 관객은 연민의 감정을 갖고 볼 수 있다.
거리 두기와 공감 사이에서
박찬욱 감독은 관객이 주인공 만수의 행동에 완전히 공감하게 하는 대신 ‘거리 두기’를 하게 만든다. 관객이 어떤 예술 작품을 바라볼 때 작품에 일정한 ‘거리 두기’(또는 ‘소외효과’라고도 한다) 하도록 만드는 것은 브레히트가 처음으로 자신의 연극에서 시도한 기법이다. 관객이 극에 감정적으로 몰입하지 않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다(하지만 나는 브레히트의 작품을 보면서 ‘거리두기’가 별로 안 됐다).
그런데 박찬욱은 그 ‘거리 두기’와 동시에 관객이 어느 정도 주인공에게 공감하기를 바랐다고 한다(감독의 직접적인 설명). 그 어중간한 연출 방향(이건 순전히 감독의 예술적 만족감과 상업적 성취 둘 다 잡고 싶은 욕심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사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심리도 모호해지는 것이 아닐까.
박찬욱 특유의 희한한 유머는 이 영화에도 간간이 등장한다. 심각한 순간에 곁다리 같은 이야기로 뜻밖의 유머를 만들어내려는 연출인데, 예를 들어 만수가 첫 번째 살해 대상자인 ‘범모’ 앞에서 총구를 겨눈 채 한바탕 훈계를 늘어놓는 장면 같은 것인데, 개인적으로 이런 장면들은 지나치게 ‘영화적’이어서 그다지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관객을 웃기려고 하는 연출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가.
나무가 의미하는 것들
재미있는 것은, 범모는 신기할 정도로 만수와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아니, 범모는 만수의 과거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인물이나 마찬가지다. ‘종이밥’을 25년째 먹고 산 제지 전문 기술자라는 점, 만수는 과거 알코올 의존증이었으나 이제 술을 끊었지만 범모는 실직 후 술에 절어 산다는 점. 그리고 범모의 아내가 현재 젊은 남자와 외도 중이라는 점(물론 만수의 현재 아내가 외도를 저지른다는 증거는 없다. 만수가 의심할 뿐) 등에서 그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자연히 두 번째 희생자는 만수의 현재 상태를 구현한 또 다른 인물이며,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쓸쓸히 살고 있는 세 번째 희생자는 만수의 미래 모습일 수도 있다.
한편, 만수는 종이밥 정도가 아니라 종이의 원료가 되는 나무도 무척 사랑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난폭해 보일 정도로 나무를 거침없이 잘라내는 장면은 종이를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이기도 하지만, 한국인이 종종 ‘모가지를 자른다’는 말로 표현하는 해고를 뜻하기도 한다(애초 감독은 이 영화의 제목을 ‘모가지’로 하려고 했단다).
이 영화에서 나무는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만수의 집 정원에 있는 나무를 보며 그의 아내가 아이에게 말한다. “나무에게 최고의 거름은 인간의 똥, 오줌이란다. 이런 거름을 준 나무에서 가장 맛있는 과일이 열리지.”
영화 후반부, 만수가 죽인 사람의 시체를 정원 나무 밑에 심는다. 이제 이 가정은 타인의 죽음이란 토양 위에서 유지될 것이다. 과연 가장 맛있는 열매처럼 이 집은 앞으로도 가장 빛나는 삶을 살게 될까? 자연히 그런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 초반부, 풍성한 나무들과 그 사이로 비치는 눈부신 햇살로 인해 초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웠던 그 집의 정원은 모든 사건이 정리된 후반부에 가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과 음울한 잿빛 공기로 채워진다. 그래서 관객은 그 집의 미래가 결코 눈부시지 않을 거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몇 가지의 메타포들
박찬욱의 영화답게 이 영화에는 다양한 메타포들이 등장한다.
그중 하나는 ‘뱀’이다. 영화 초반부, 주인공의 가족은 파티를 한다. 이때 만수는 회사 사장이 명절도 아닌데 선물로 주었다면서 장어를 구워 아들에게 준다. 아들은 이것이 뱀이냐고 묻는다. 중반부, 만수가 범모를 죽이기 위해 찾아간 그의 집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뱀이 자주 출몰한다. 만수는 그 뱀에게 다리를 물리고 범모의 아내가 입으로 독을 빼준다.
문학이나 예술에서 뱀은 대개 유혹을 상징하기도 하고 간교함 혹은 간사함을 상징한다. 사장이 준 뱀과 비슷한 모양의 장어는 해고를 앞둔 직원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간사한 선물이다. 범모의 아내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당연히 이 장면에 등장하는 뱀은 유혹을 상징한다.
만수는 치통을 앓고 있다. 그런데 그는 3개월 안에 재취업을 하면 그때 충치를 뽑겠다면서 미련하게 버틴다. 심지어 자기 아내가 치위생사인데도 그런 미련을 떤다. 이는 주인공의 어리석은 캐릭터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감독 본인의 직접적인 설명대로 한국 고전영화 <오발탄>에 대한 오마주이다.
이 영화에는 햇빛이 강하게 눈을 찌르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대개 영화에서 이런 장면은 인간의 죄악을 드러내서 인물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기제로 작용하는데, 이 영화에선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 그런데 후반부에서 모든 사건이 다 정돈된 후에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향하는 이 햇빛을 가려준다. 주인공은 이제 앞으로는 잔혹하게 찔러대는 운명의 창날을 피할 수 있게 될까?
만수는 회사에 다닐 때는 콧수염을 기르지만, 실직 상태일 때는 콧수염을 기르지 않는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에게 콧수염은 가장으로서 그리고 전문 기술자로서의 자신감 같은 것일까. 혹은 권위를 상징하는 것일까?
거의 모든 공정이 자동화되어버린 공장, 인간의 노동이 소외된 공장에서 주인공은 이제 태블릿으로 관리 감독만 한다. 그는 마지막 점검을 위해 방망이로 제품을 두드리는 아날로그 방식을 이젠 사용하지 않아도 되지만 굳이 그렇게 한다. 인간으로서 그리고 기술자로서 자신의 ‘쓸모 있음’에 대한 자존감 확인이자 안간힘 같아서 공허하고 안쓰러워 보였다. 이건 거의 모든 분야가 AI로 급속히 대체되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서늘한 경고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재미없다, 지루하다고 하는 관객들이 적지 않다. 서두에 썼듯이, 주인공의 행위와 처지에 그다지 공감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가지가 불필요하게 너무 많이 뻗어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야기의 기본 뼈대가 너무 간단해서 그렇게 곁가지를 많이 붙인 것일까. 어떤 ‘맛’도 갖고 있지 않은 잔가지들은 좀 쳐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