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중엔 ‘트라우마’라고 말할 정도로 끔찍한 과거의 경험을 안고 살아가는 피해자들도 있다. 어떤 이는 그 트라우마가 너무 깊어서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을 파괴하거나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안긴 상대방을 파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동안 수많은 예술 작품들이 이러한 전형적인 피해자 서사를 반복해서 묘사해 왔다.
하지만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은 그러한 인물의 전형성을 전복한다. 어린 시절 평생 씻기 힘든 피해를 겪었지만 그 피해에 결박당해 평생 피해자의 정체성으로만 살고 싶지 않은 열여덟 살 소녀 이주인. 그는 자신만의 단단한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의 ‘주인’으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피해자다운’ 모습을 기대한다. 주인이가 자신이 겪었던 피해 사실을 밝히기 전까지만 해도 스스럼없이 함께 어울리던 절친들이 주인의 피해에 관해 알고 난 후에는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부담을 느낀다. 그리곤 끊임없이 ‘괜찮냐’고 물어보며 그의 ‘피해자성’을 이끌어내려 한다.
물론 주인이 겉으로는 세상 누구보다 밝게 웃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난 괜찮아”라고 말하지만, 정말 괜찮은지 혹은 괜찮은 척 연기하는 것인지, 그 아이가 속으로만 품고 있는 정확한 감정의 결을 관객으로선 알기 어렵다.
주인이가 욕실에 들어가 한 시간 동안이나 무엇을 하는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욕실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주인의 엄마를 통해 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동안 이런 일은 종종 있어 왔을 것이다.
세차장 장면은 주인이의 내면을 강렬한 시각적 역설로 묘사하고 있다. 세차기가 돌아가는 동안 차 안에 엄마와 나란히 앉은 주인이는 엄마를 원망하며 격한 울부짖음과 울음을 토해낸다. 세차장을 통과한다는 것은, 차 밖에선 매우 격렬한 일이 일어나지만 내부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주인이의 내면에서는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치고 있지만 외부의 시선으로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고요해 보이는 상황을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에는 사과가 매우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한다. 사과를 싫어하는 주인이는 담임이 권해도, 친구들이 권해도 사과를 먹지 않는다. 어쩌면 사과는 주인이에게 남아있는 끔찍한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매개체일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주워 올린 주인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장면은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주인의 첫 시선을 상징한다. 이렇듯 감독은 직접적인 설명 대신 몇 가지의 징후를 통해 관객이 숨은 의미를 능동적으로 해석하기를 권한다.
주인의 동생 해인이의 마술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은유하고 있다. 마술은 감추는 예술이다. 사람들의 눈앞에서 사라진 듯 보이지만, 실상은 단지 감춰졌을 뿐이다. 관객은 굳이 마술의 비밀을 파헤치려 하지 않는다. 감독은 이 마술이란 장치를 통해 상처의 존재 방식을 시각화한다. 상처는 지워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다만 감춰질 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관객에게 타인의 상처를 굳이 드러내려 하지 말라고 말한다. 트라우마의 당사자를 치유하려는 서툰 시도 대신, 그가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권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가장 감독의 시선과 일치하는 인물은 태권도 관장이다. 그는 또 다른 피해자 미도가 태권도장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다 화재로 그을린 벽을 굳이 지우지 않는다. 그것은 흔적을 없애지 않음으로써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바라볼 것을 권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주인공 외에도 아픔을 삼키는 인물(심지어 예닐곱 살의 어린아이조차)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들은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윤가은 감독은 그런 그들에게 권한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라”고.
결국 이 영화는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에 대한 존중의 방식을 말하고 있다. 내가 겪지 못한 엄청난 아픔을 겪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보여야 할 태도는 그저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웃어도 ‘괜찮냐’는 물음도, 어서 극복하라는 조언도 아닌 태도. 그것은 마치, 이 영화에서 실컷 울부짖고 난 주인에게 엄마가 별다른 위로의 말없이 휴지를 건네주며 “차로 한 바퀴 더 돌자”고 하는 태도와 비슷할 것이다.
창작이란, 기존의 뻔한 클리셰를 전복하는 데 본령이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창작의 전범을 보여준다. 윤가은 감독은 우리가 수없이 보아온 전형적인 ‘피해자 서사’를 뒤집음으로써 인간의 상처와 존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세계의 주인>은 올해 최고의 한국 영화의 반열에 올려도 충분한 작품이다.
*이 리뷰는 <오마이뉴스>에도 실었습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