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전 한국 사회가 때론 그립습니다.
이제는 의대 때문에 판도가 완전히 달라졌지만(어느 지방 의대와 해당 대학의 비 의학과 간 커트라인 차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1990년대 이전까지를 생각했을 때 ‘단일 대학에서 구성원 간 지적 차이가 가장 크게 나는 대학’은 역설적으로 서울대학이었다고 저는 봅니다.
제가 입학하던 1984년을 예로 들겠습니다.
당시 학력고사 수석은 340점 만점에 332점이었습니다. 문과에서 2명, 이과에서 1명이 나왔지요. 그때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커트라인은 290점대 초반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입학한 동양사 서양사학과 예상 커트라인은 296점이었고, 농대는 280점대로도 갈 수 있었습니다.
학력고사에서 320점대와 290점대는 레벨이 완전히 다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제가 졸업한 고교는 입시 공부에 매진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숱한 재수생을 냈지요. 270점대를 맞아서 연고대를 떨어진 친구들이 대성이니 종로니 당시 탑급 입시학원에서 재수를 하면 대략 300점 정도를 맞아 서울대 사회과학대와 인문대를 왔습니다.
그럼에도 그들 중 320점 정도를 맞아서 서울대 법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친구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애초 320점대를 맞을 머리가 못 되는 것이니까... 그런 머리였다면, 애초 270점대를 맞지도 않았겠지요.
반면, 저보다 고교 1년 선배였던 부동의 전교 1등짜리(이하 ‘A’로 약칭)는 서울 법대에 입학한 뒤 채 300명을 안 뽑던 사법시험을 단 1년 3개월 공부해서 대학 재학 중 붙더군요. 1983학년도 학력고사가 쉽기는 했지만(수석 점수가 339점이었습니다. 법조계에서 지금도 유명짜한 홍승면 씨였지요.), A는 328점을 맞았습니다.
재수해서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 제 고교 동창이나, 문과 전교 1등으로 졸업했지만 A보다는 못한 것으로 보이던 고교 후배(서울대 법대 입학)가 만 4년 이상을 공부해서 붙은 게 사법고시였는데...(두 명은 각각 1990년과 1991년에 붙었습니다.)
하긴, 제가 1990년 조선일보에 입사할 때도 그랬습니다. 언론사 인기가 정말로 좋았던 시절, 저는 대입 때 이상으로 공부해서(오전 6시 도서관 입실, 밤 11시 퇴실하는 일상을 만 1년 6개월 이상 했습니다.) 겨우겨우 붙었는데... 저와 함께 입사한 12명 신입 기자 중 서울 법대 출신이 두 명 있었는데, 그들은 아무리 봐도 저와 비교하면 ‘설렁설렁’ 공부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사법고시에 붙지 못하고 온 사람들이었는데도.
그때 생각을 확실히 정리했습니다.
‘지적이든 육체적이든 사람마다 ’오를 수 있는 임계치‘는 다르다. 너무 꿈을 높게 잡지는 말자.
훗날 스포츠용품 제조사인 아디다스에서 ’Impossible is nothing’이라는 광고를 하는 것을 보면서 웃었습니다. 저런 레토릭에 속아서 살면 안 된다고.
제가 너무 식견이 좁아 보이십니까? 그럼, 제가 ‘증명’하지요.
당장 100m 달리기에 매진해보십시오. 귀하가 아무리 젊었어도, 대부분 11초 00 안쪽으로 달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식단을 바꾸고 세계적인 코치 아래서 아무리 운동을 해도 귀하는 11초 00으로는 못 달립니다.
아쉽지만 그건 DNA가 결정한 겁니다. 물론 극소수로 11초 안으로 달리는 분도 있겠지요. 하지만 황인종을 유전적 표현형으로 태어난 대한민국 국민 중 10초 안쪽으로 달릴 수 있는 사람은 앞으로도 지극히, 아주 지극히 드물 겁니다.(현재 한국 기록이 10.07입니다.) 더 나아가, 100M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황인종을 유전적 표현형으로 하는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나오기 힘들 겁니다. 흑인의 physicality를 황인이 따라가기는 힘드니까.
마라톤 역시 마찬가지. 요즘 마라톤 세계 기록을 살펴보십시오. 죄다 케냐와 이디오피아, 혹은 그 나라 출신으로 외국에 귀화한 사람이 전부입니다. 세계적 명장이었던 정봉수 감독 밑에서 황영조 이봉주가 요즘 다시 뛴다 한들, 그들이 올림픽을 제패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저는 봅니다. 1990년대 이후 ‘마라톤 선수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프리카 중동부 출신들이 마라톤에 뛰어든 결과입니다.
축구 역시 마찬가지.
1980년대까지 유럽 축구 국가대표 중 흑인 선수는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 프랑스나 독일 스페인 등의 축구 국가대표를 보십시오. 흑인 비율이 ‘인구 구성 비율’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20년 뒤에는 그 비율이 더 높을 겁니다.
복싱이나 종합격투기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몸과 몸이 직접 부딪히는’ 스포츠에서 흑인을 따라가기란 어렵습니다.
(이 장면에서, “그럼 8체급을 제패한 필리핀 복싱 선수 파키아오는 뭐냐”라고 반박하시는 분이 있다면, 그는 ‘체급’을 이해 못 한 겁니다. 체급을 나눈다는 것 자체가 ‘우열’을 나누는 겁니다. 파키아오가 헤비급 복싱에서 세계 랭킹에 들 것이라고 보시나요? 황인종 등 동양인이 강세를 보이는 스포츠 분야는 양궁이나 탁구 배드민턴 등입니다. 육체성이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는 분야이지요.)
저는 ‘극최상위’는 노력으로 따라갈 수 없다고 봅니다. 귀하가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11초 안에는 못 뛸 겁니다. 아무리 오래달리기를 열심히 한다 한들, 마라톤을 3시간 안에 뛰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건, 타고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부 역시 마찬가지.
사람들은 상위 1%를 ‘대단한 벽’처럼 이야기하는데,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고교 1학년 때 측정한 아이큐가 108이던 제가 서울대를 가고, 당시 인기 절정이던 언론사 중에서도 최고 메이저 신문에 합격했던 것을 보면 상위 1%는 보통 능력을 가진 사람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면 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상위 0.1%, 0.01%는 다르다고 봅니다. 글쎄요, 상위 0.1%, 즉 1000명 중 한 명은 노력으로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상위 0.01%, 즉 1만 명 중 1명도 노력으로 이룰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일반인의 동의를 얻기 힘든 이 글을 왜 썼냐고요?
이 기사 때문입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3/0003862961?sid=101
저는 삼성전자가 세계적 기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극최상위 이과 지적 엘리트들’이 6.25 이후 물리학과나 전자공학과 기계공학과 등에 갔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런 흐름이 응축된 덕에, 이 나라는 삼성전자를 가지게 됐고 강국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고 봅니다.
다시 제가 입학하던 때를 돌아보면, 서울대 물리학과 커트라인은 309점 정도였습니다. 전자공학과나 제어계측과 등은 310점대였고요. 서울대 의대는 305점 정도였습니다. 백분위로 친다면, 물리학과 커트라인인 309점은 문-이과 통합으로 볼 때 0.2% 안쪽이었습니다.(극최상위의 경우, 이과 점수에서 3~4점을 더하면 문과와 동일 점수로 치던 시절입니다.) 당시, 연세대 의대 커트라인은 서울대 공대 중위권 학과와 비슷하거나 약간 낮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 다른 의대는 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 분위기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문-이과 구분 없는 사법고시 열풍’으로 바뀌었고, IMF 이후에는 의대 쏠림 현상으로 변한 것이지요.
24학년도 기준, 정시로 꼴찌 의대를 가려면 상위 0.6%를 해야 합니다. 서울대 공대는 1%대 성적으로 충분히 갈 수 있게 됐고요.
이런 분위기에서 삼성전자가 세계 최강의 공업기업으로 남을 수 있을까요? 쉽게 말하면, 학력고사 0.8%를 했던 저 같은 놈이 서울대 물리학과를 갈 수 있는데?
지난 25년 동안 누적된, ‘미래 엘리트가 될 이들이 자연과학과 공학에서 이탈한 결과’가 이런 상황을 초래한 것이지요.
‘소년이로학난성 일촌광음불가경’을 외치며 형설지공을 되뇌었던 중국과 조선이 15세기 이후 뒤처지게 된 것은 수학과 물리학 등 자연과학과 공학에 눈길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저는 봅니다.
중국과 조선이 여전히 ‘천지원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처럼 평평하다.)만을 외칠 때, 유럽은 과학적 실증과 탐구를 통해 지구가 둥글며,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근대’입니다.
‘공부의 방향성’, 혹은 ‘국가가 어느 분야에 인재가 모일 수 있도록 역량을 쏟는가’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군인 출신이기에 ‘전략적 사고’를 잘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독재자 박정희는 국가의 발전이 어떤 방향으로 이뤄져야 하는가를 제대로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과학의 기술의 발전을 그토록 강조했지요.
박정희 이후, 국가 발전을 전략적 차원에서 박정희만큼 고민했던 정치 지도자가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저는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우승하면 카 퍼레이드를 하던 시절, ‘과학 하는 마음으로 능률 있게 일하고, 사람마다 손에 손에 한 가지씩 기술 익혀...’라는 동요를 초등학교에서 배우게 했던 시절이 그리운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https://youtube.com/shorts/InLjszR3bdg?si=g_puPM97ZV4fAzh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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