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천정이 무너지면?

by 코리디언


하늘이 무너지면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천정이 무너지면 그냥 먼지만 날릴 뿐이다.

몇 번을 쓸고 닦아내도 남아있는 먼지를 어쩔 수 없어 그냥 포기하고

거실로 피난살이 나온 부엌짐들을 하나씩 옮기면서, 추억도 생각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쓸만한 것들은 다시 제 자리를 잡아주고 있다.


얼마 전 부엌 대 공사를 했다.


나의 글 100년 된 아파트에 삽니다. 에서 밝혔듯이 나는 지은 지 100년 되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래서 청소를 해도 뽀다구도 나지 않고, 마룻바닥은 디딜 때마다 나이만큼 앓는 소리를 해서 그 소리가 안쓰러워 두꺼운 카펫도 깔아주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100apt


문들은 문틀과 잘 맞지 않아서 화장실 문은 헐거워져서 제대로 닫히질 않고, 안방 문은 뻑뻑해서 열고 닫을 때마다 힘을 주어 페인트가 벗겨지고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2년 전 딸아이의 방 천장과 마룻바닥이 결국 대 수술을 받았다.

천정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횟가루들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이사 올 때부터 문제가 되었던 마루로 깔린 방바닥이 내려앉았다.

그래서 방 전체를 레노베이션하는데 한 달이 걸렸다. 공사만 한 달이지 공사하겠다고 와서 공사계획 짜고, 예산 세우는데만 6개월이 걸렸다. 달팽이 속도로 일하는 이곳 사람들 땜에 속이 터진다.

그런데 그런 재앙이 이번엔 부엌에서 벌어졌다. 다행히 냉장고를 세워둔 천정이 내려앉아 사람이 다치거나 물건이 부서지거나 하는 참사는 없었으나 이 또한 오래된 건물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났다.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이번엔 바닥은 멀쩡해서 그런지 공사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부엌에 있는 모든 살림살이를 옮기는 것이 이젠 버거운 나이라 정리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긴 했다.

공사가 시작된 첫날 인부들이 집안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정신 사나왔다.

그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간 부엌에서 간단한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구멍 난 천정을 보니 천정을 받치고 있는 앙상한 나무 구조 골대가 보였다.

혹여 윗집에 사는 사람들의 발이라도 보일까 봐 걱정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천정에서 쏟아낸 먼지들이 소복이 쌓인 부엌에서 연신 재채기를 하다가 나왔다.

갑자기 집안에서 캠핑모드의 삶이 당분간 지속되겠다.

부스타를 꺼내고 양은 냄비에 물을 붓고 라면으로 저녁을 때운다.

점심은 불을 쓰지 않는 샌드위치로

아침은 기 버터를 넣은 커피 한 잔으로…


이제 얼추 공사가 끝났다.



다시 새롭게 된 부엌에 피난 나왔던 짐들을 제자리에 넣으면서 오래된 물건을 정리했다.

아이들 이유식을 시작할 때 사용했던 당시에는 거금을 들여 사놓았던 명품(?) 플라스틱 그릇들과 물을 마시던 곰돌이 푸 물컵도, 캐나다에 와서 친정어머니처럼 나를 돌보와 주셨던 에밀리 할머니가 주신 넓은 접시도, 20년 전 같이 공부했던 지인이 남겨주고 간 컵받침도 추억만 남기기로 하고 모두 버렸다.


부엌에 공간이 생기고, 몸집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이참에 옷장과 신발장까지 손을 댔다.

15년 전 큰맘 먹고 산 무스탕코트와 30년 넘게 함께한 옷들을 언젠가는 입으리라 기대하며 큰 여행가방에 넣어둔 것을 아예 통째로 밸류 빌리지 (Value village- 구세군에서 운영하는 재활용판매매장)에 갖다 주었다.

유학시절 지인들이 떠날 때 물려주고 간 물건들을 못 버리고 여기까지 끌고 와서는 쓰지도 않고 창고에 넣어둔 채 잊어버렸는데 그것들도 차곡차곡 챙겨서 함께 갖다 주었다.

그렇게 두 차례 큰 짐들을 갖다 주었더니 그곳에서 쓸 수 있는 2불짜리 상품권 2개를 얻었다.


550935_9059__0065s_0000_2121_Oshawa_001-EXT.jpg
KakaoTalk_20251119_094810446.jpg


옛날 고사성어에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든가?


오히려 천정이 무너져서 나는 집도 청소하고, 새로운 부엌도 얻고, 좀 더 미니멀한 삶에 생겨나는 공간의 여유를 누리게 되었다.

계절이 바뀌면 부지런한 사람들은 일부러라도 집을 청소하고 정리하는데, 이렇게라도 묵은 짐들을 덜어내고 나니 한결 내 맘도 , 집도 좀 가벼워진 느낌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또다시 찾아온 11월, 퀘벡의 모벰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