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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Nov 29. 2022

토해내지 못한 슬픔도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민서야 잘 지내니. 너 대체 어떻게 지내니.



벅찬 일이 생기면 나는 아직도 네가 떠올라. 그렇지만 아주 남이 되어버린 우리. 네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곳을 다니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지 나는 이제 하나도 모르지만. 그때는 네가 내 옆에 있기만 해도 모든 게 괜찮았는데. 삼 년 내리 붙어다닌게 무색하게도 정말로 영영 헤어져야만 했던 졸업식 날, 너에게 전화를 했었잖아. 사진이라도 같이 찍고 싶은데 어딨냐고 재촉했었잖아. 고새 가족들이랑 밥 먹으러 갔다고 미안하다 얘기하는 너에게 핀잔을 줄 게 아니라 잘 지내라는 마지막 인사나 할 걸 그랬지.


마지막을 지날 때 마지막인 줄 몰랐다는 말. 그거 실은 거짓말이었어. 너도 알았겠지만.


영어 필기체를 쓰다 보면 가끔 네가 떠올라. 네가 쓰는 글자 모양을 어설프게 따라 하다 내 것이 생겼어. 너에 대한 건 네가 남긴 아주 작은 테이프 하나까지 버리지 못하고 모아놓은 나지만 정작 네가 어딨는지, 뭐 하는지 아는 건 없어. 내 기억 속에 얕게 남은 것들은 오로지 너의 과거뿐이고. 나는 내 마음을 부끄러워해. 대체 왜 그렇게까지 강박적으로 너를 떨쳐내려 애썼을까?


다시 만나게 된다면 물어보고 싶어. 나의 기만적인 사랑을 눈치챈 거니, 너.


너에 대한 사랑, 애정, 연민, 동정, 질투, 열등감…. 나는 너를 올려다보는 동시에 내려다봤고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했어. 너에게 온 마음을 내어주면서도 동시에 가차 없이 이용하기도 했고. 밝으면서도 늘 미운 구석이 있던 나. 너도 그걸 눈치채 내 곁을 떠난 걸까? 여전히 갈색곰인형은 내 방 서랍에 놓여있어. 그렇지만 그게 너에게 무슨 의미겠어.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거긴 하겠어.


나 다시 생각해보면 너에게 그다지 좋은 친구는 못됐던 것 같아. 너에게 그 어떤 '단일한' 존재도 되지 못했던 것 같아. 이게 바로 내가 너를 놓지 못하는 이유, 다른 게 아니라, 다른 것 보다도,


네가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는지 안경은 여전히 쓰는지 머리를 길었다면 얼마나 길렀고 잘랐다면 왜 잘랐는지 여전히 공부하다 답답하면 노트 한구석에 낙서를 하는지 - 이 모든 것을 다 제쳐두고 - 살아 있는지. 이 땅에 제대로 두 발 붙이고 숨 쉬며 살고 있는지.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너의 생사, 성취, 욕망, 현재, 거취, 생김새, 성격, 말투, 취향, 글씨체. 내가 궁금한 건 이런 것들이야. 핸드폰을 바꾸면서 너와 했던 대화들, 주고받았던 사진들이 다 날아갔어. 방금 깨달았는데 네가 보내줬던 마지막 문자까지 사라졌더라. 넌 왜 내 안 어느 한 구석에도 남아있지 않아? 너를 알던 시절이 도무지 진짜 같지 않아서 편지를 모아놓은 상자를 열어 네 흔적을 뒤졌어. 그러다 찢긴 노트 조각 하나를 겨우 발견해 증거처럼 가져와 붙여둔다.


기억 속에만 머무르면 죽은 것과 다를 게 뭐야. 네가 나에게 죽은 사람과 다를 게 뭐야. 나는 왜 늘 죽은 사람과 더 친할까? 


나는 열여섯 너에게 지금도 말을 거는데. 스물한 살의 네가 있다는 게 뭐가 중요해. 살면서 다시는 만날 수 없대도 이 무한한 우주에서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만으로 위로가 돼? 그게 어떻게 위로가 돼. 안심은 한 시간을 못 가, 그리고 대번에 밀려드는 방심, 마침내 죄책감. 우리는 만나야 해. 저런 게 전부 위로가 못 돼서 우린 다시 만나야 해. 해서 가끔은 막연한 상상을 해. 길을 걷다 아주 우연하게, 그 정도의 인연이 아니라면  억지를 써서라도 다시 한번 만나게 되는 장면을. 내가 너에게 미안했다고 얘기할 수 있도록.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대해서도.


그러니 민서야, 네가 일단 살아있기를 바래. 그리고 제발 행복하기를 바래.

늘 그거 두 개만 바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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