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약한 가능성을 무시하지 마라.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을 아우르는 청소년 시절까지 나는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촌 형이 소녀 시대의 미모를 찬양할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 줄 몰라 얼굴이 뻣뻣해진 적도 있다. 면식이 없음에도 예쁘고 멋진 사람들을 추종하고, 찬양하는 이유가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했다. 미(美)를 추구하는 데에 이유가 있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 만큼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의 나는 그 근원이 섹슈얼리티에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나는 무대에서의 섹시어필보다는 퍼포먼스와 노력 그리고 역경을 헤쳐나간 스토리를 더욱 집중해서 보았기에 이런 생각은 더더욱 편협해졌다.
그렇게 나는 아이돌 업계와 문화를 성욕에 충실한 이들이 종사하고, 구성하는 장소로 매도하며 신경을 껐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은 무척이나 사소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우연히 녹화된 아이돌 무대를 접하게 되었다. 충격이었다. 분명 내가 기억하는 아이돌은 섹시어필에 집중한 의상과 안무 그리고 노래였는데, 내가 본 무대는 그렇지 않았다.
아이돌 그룹에는 세대가 있다. 태초에 댄서와 가수가 혼합된 아직 아이돌의 개념이 정의내려지지 않은 1세대 아이돌이 있었다. 그 다음은 강렬한 비트와 안무를 바탕으로 댄스 음악으로서의 정체성이 더욱 강해진 2세대 아이돌을 지나, 이성에 어필할 요소들을 강화한 3세대 아이돌까지. 남자 아이돌이라면 유려한 소년미 혹은 짐승 같은 근육이 있었을 테고, 여자 아이돌이라면 몽환청순, 섹시어필, 러블리함 등이 있었을 터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아이돌에게 관심을 껐던 시기가 바로 이 3세대 아이돌이었다. 하지만 4세대 아이돌으로 오면서 아이돌 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이전까지 관성적으로 이성 팬만을 추구하던 업계에서 혁신가라고 불러도 좋을 누군가가 ‘소녀 팬들에 포커스를 맞춘 걸그룹’을 등장시켰다.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이전까지는 보호자에 의존한 누군가의 ‘딸’,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성립했다면 이제는 ‘남자’와 ‘여자’라는 자아를 형성해간다. 이것은 등불 하나에 의지한 채로 망망대해를 여행하는 일과 다름없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들만의 우상을 탐색한다. 소녀들은 자신이 되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여성성을 찾는다. 소년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반대로 자신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을 찾는다. 그리고 이 모든 요소가 문화적으로 교집합하는 지점이 아이돌이다. 청소년들은 아이돌에게 자신들의 우상을 투영한다. 그리고 아이돌은 퍼포먼서로서 이에 화답하며 청소년 자아의 공백을 매운다.
만약 단순히 아이돌 업계의 본질이 섹슈얼리티에 기반한 성적 매력의 판매였다면 이 시도는 처절하게 실패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료가 작품의 가치를 결정짓는 유일한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세기의 명작이라고 뽑히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또한 단순한 유화일 뿐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돌 문화의 본질이 섹슈얼리티라는 말은 과거에는 맞는 말이었는지도 몰라도 이제는 아니다. 심지어 과거에 질적으로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던 아이돌 그룹의 노래, K-POP 또한 안무, 보컬, 랩, 힙합 그리고 심지어는 오케스트라까지 흡수한 종합 예술로 거듭났다.
어린 시절, 나는 나비로 변태하는 애벌레의 가능성이 경이로워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전 형태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진화하는 건 살아있는 것만의 특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문화 또한 변태(變態)한다. 그렇기에 나는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자신이 무시하던 무언가가 화려하게 피어난 것을 목도한 사람이 있다면 내 말에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