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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줌 Dec 18. 2024

잔스포츠 가방의 뜻밖의 용도

20세기 소녀의 일일


 교복을 입은 학생 서넛이 태양목욕탕이라고 쓰인 표지판 뒤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귀 밑 삼 센티로 똑 단발을 하고 서일중학교 교복을 입은 여중생 민지도 거기에 있었다. 6월의 초입인데 벌써 더워진 날씨 탓에 학생들은 모두 하복 차림이었다. 민지도 학기 초부터 입었던 춘추복 대신 오늘은 하복을 꺼내 입었다. 주말 사이 햇볕에 잘 마른 블라우스에서 상쾌한 내음이 났다.


 둥그렇게 곡선으로 마감된 카라가 그녀의 어깨를 덮고 등까지 이어져 있었다. 블라우스 목 부분에 빨간 바탕에 노란색과 감색 점선이 교차하는 체크무늬 목댕기가 앙증맞게 걸려 있었다. 같은 천으로 된 치마는 앞 주름이 깊은 항아리 형태였다.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엉덩이에 딱 붙게 줄여 입는 복고풍이 유행이었지만 민지는 엄마가 스마트 교복점에서 거금 들여 사준 교복을 수선하지 않았다.


 그녀 앞에 서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던 키 큰 남학생이 버스가 오는 방향을 힐끔거리더니 한 발짝 크게 앞으로 다가섰다. 선두의 움직임에 주변에 느슨하게 줄을 서 있던 학생들도 하나둘 표지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기다리던 34번 마을버스가 사거리 모퉁이를 돌아 목욕탕 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뒤에 있던 학생 몇몇이 갑자기 차도 코앞까지 다가서는 바람에 마을버스 기사로서는 누가 제일 먼저 왔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갑자기 시작된 눈치 게임에 칙 하버스 문이 열리기 무섭게 덩치 큰 남학생들이 앞다투어 버스에 올랐다. 체구가 작은 민지는 오늘도 순서를 놓쳤다. 정류장에 번째로 도착했는데 버스에는 제일 늦게 올랐다. 그 편이 차라리 속 편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먼저 타려는 남학생들과 몸을 최대한 부딪히지 않으려고 뒤로 빠지곤 했다. 버스 계단에 오르기 위해 다리를 들어 올릴 때 어김없이 펄럭이는 교복치마가 신경 쓰여서였다. 그녀는 양손으로 치마 아랫단을 잡아 뒷허벅지밀착시킨  조심스레 계단을 올랐다. 버스의 탑승 계단은 고작 개뿐이었지만  작은 여중생에게는 한 발 한 발 힘을 주어 디뎌야 할 만큼 높았다.


 "...... 안녕하세요."

 "빨리 타, 학생!"


 버스 기사 아저씨의 재촉에 그녀가 백 원짜리 동전을 서둘러 요금통에 넣었다. 땡그랑. 첫 번째 동전을 넣을 때 이미 버스는 문이 열린 채로 출발하고 있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그녀는 얼른 왼손으로 기둥을 붙잡고 오른손으로 나머지 동전 두 개를 마저 넣었다. 기사는 짧은 스포츠머리에 라이방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거센 풍랑을 만난 대항해 시대의 해적이 조타륜을 돌리듯 우회전 차로를 만난 그가 급히 핸들을 꺾었다. 그 바람에 민지의 몸이 서핑보드에 올라탄 것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아까 기둥을 잡지 않았으면 벌써 맨 뒷자리까지 굴러갔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잠시 급가속의 파도를 탄 34번 버스는 직진차로에 들어서자 이내 일정한 속도로 주행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민지의 시선도 버스 안 쪽을 향했다. 버스 안은 이미 만원. 좌석은 모두 점유되어 있었고 방금 탄 학생들은 대부분 양쪽으로 등을 돌린 채 천장에 매달린 손잡이를 한 손으로 잡고 서 있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최신 유행 잔스포츠와 이스트팩 가방을 메고 있었다. 그녀도 새로 산 자주색 잔스포츠 가방을 메고 왼 팔에는 신발주머니를 든 채였다.


 내리는 문 바로 앞자리 근처에 작지만 빈 공간이 보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다가가 의자 손잡이를 잡는 데 성공했다. 천장에 달려 있는 손잡이는 잡으려고 손을 올리면 블라우스가 딸려 올라가는 바람에 옆구리 살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게다가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어 손에 쇠 냄새인지 땀 냄새인지 모를 악취가 배어났다.


 그녀는 그래도 오늘은 한 번에 버스를 타서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어떤 날은 일찍부터 기다려도 만차라며 버스가 서지도 않고 지나갔다. 문을 열면 그대로 쏟아져 내릴 듯 빽빽이 차 있는 사람들을 차창 밖에서 보면서도 미안하다 한 마디 없이 쌩 지나가는 버스가 너무 야속해서 눈물이 났다. 멀어져 가는 만원 버스의 뒷모양을 바라보며 토끼눈으로 째려보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


 태양목욕탕 다음다음 정류장에서 말끔하게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버스에 올다. 그는 천 원짜리 지폐를 요금통에 밀어 넣고 말없이 서서 버스 기사를 쳐다봤다. 기사는 요금통에 든 지폐를 곁눈으로 확인하고는 역시 말없이 레버를 눌러 거스름돈이 나오게 했다. 철컥. 땡그랑. 땡그랑. 남자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동전들을 챙겨 양복 주머니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 안을 살펴보더니 소리 없이 민지 쪽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느라 그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중년 남자는 어깨를 좁히더니 잔스포츠 가방을 멘 학생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녀의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버스 안은 사람들의 체온으로 후텁지근했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아주머니의 정수리에서 진한 헤어스프레이 냄새가 올라왔다. 옆에 선 남학생의 어깨춤에서는 비릿한 땀냄새가 풍겼다. 온갖 냄새와 습도가 섞인 버스 안에서 그녀는 겨우 손을 뻗어 창문을 조금 여는데 성공했다.


 바로 그때였다. 느낌이 이상했다. 탑승객이 늘어감에 따라 점점 옆사람들과 몸의 옆면이 닿는 면적이 늘어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 들었다. 뭐지. 동공이 커지고 심장박동이 빨라다. 그녀의 엉덩이 뒤로 무언가 뜨거운 것이 닿더니 슬며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점점 단단해지고 밀착되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소리는커녕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는 눈이 없는 만원 버스 안에서 남자는 점점 더 대담해졌다. 그녀의 치마 뒤편에서 미꾸라지 같은 것이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벗어나보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인파로 꽉 찬 버스 안에서 그를 피할 공간은 없었다. 갑자기 주변 사람들모두 사라지고 끝없는 어둠 속에 그녀와 얼굴 없는 남자 단 둘만 남겨진 것 같았다.


 남자가 뒤에서 미는 힘 때문에 민지의 몸은 착즙기에 들어간 오렌지처럼 납작해졌다. 그는 그녀에게 온몸을 밀착하고 떨리는 신음까지 나직이 뱉어내고 있었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민지는 사자에게 목덜미를 물린 톰슨가젤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졌다. 당장 뒤를 돌아 그의 면상에 대고 빽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곧바로 두려운 마음이 더 크게 올라왔다. 이 만원 버스에서 섣불리 몸을 돌렸다간 더 심한 일을 당할지도 몰랐다.


 흰 블라우스가 땀으로 젖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결심한 듯 후 하고 짧게 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힘을 주어 상체를 바로 세우고 동시에 양손으로 잔스포츠 가방 끈을 잡았다. 버클을 일제히 위로 들어 올리자 어깨끈이 풀리면서 가방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잔스포츠 가방이 잔다르크의 방패처럼 남자의 그곳과 민지의 치마 사이를 막아섰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온몸에 힘을 줬다. 허리를 세우고 밀리지 않기 위해 두 다리에도 힘을 주어 버텼다. 일 초, 이 초, 삼 초...... 드디어 남자가 눈치를 채고 뒤로 물러서더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아침에 집에서 나설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아끼는 새 잔스포츠 가방을 이런 용도로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가방이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그녀는 안도감으로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몸에 힘을 풀었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남자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버스에 오를 때와 같이 표정 없는 얼굴로 민지 학교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은옥여중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를 발견한 여학생 서넛이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하자 그가 한 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빠 미소를 보냈다. 그들이 함께 교문을 통과하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그녀는 치마 뒤편이 눅눅해진 것을 느꼈다.


 치익, 하고 버스 하차문이 닫히며 바람이 좁은 구멍으로 세게 빠져나가는 소리가 났다. 거의 동시에 그녀의 다리도 바람 빠진 풍선인형처럼 맥없이 휘청거렸다. 앞에 앉아 졸던 아주머니 뒤늦게 '잠깐만요'를 외치며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멈춰 세웠다. 그녀가 겨우 자리에 앉았다. 발갛게 충혈된 두 눈 위로 눈꺼풀이 기다렸다는 듯 무겁게 닫혔다. 땀으로 젖어 흡사 물귀신처럼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몹시 지쳐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분노인지 모욕감인지, 아니면 억울함인지 그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단어 가운데 지금 그녀의 심경을 정확히 담아낼 수 있는 낱말은 없었다. 표현할 수 없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그 감정의 정체가 민지의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 34번 마을버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신나게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한 무리의 학생들에 뒤이어 그녀도 드디어 버스에서 벗어났다. 바깥의 신선한 바람이 아직 땀이 밴 그녀의 옆머리칼을 뒤로 날렸다. 민지는 코로 크게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잠시 멈추었다 후 하고 나직이 내뱉었다. 그리고는 왼쪽 팔을 어깨끈에서 빼내어 몸 앞쪽으로 잔스포츠 가방을 당겨왔다. 그녀의 새 가방은 깨끗한 그대로인데 민지는 손으로 가방 아래쪽을 자꾸만 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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