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괜찮았다. 떠나지 않아도 살 것 같았다. 내가 나인채로, 타인이 타인인 채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지진 줄 알았다. 어쩌면 지금 이대로의 내 삶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얼마전 아이 친구네와 치앙마이 여행을 다녀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여행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동행했다. 엄마끼리도, 아이끼리도 각자의 취향과 고민이 비슷했기 때문에 괜찮을거라 생각했다. 막연히 우리의 관계는 더 깊어지고 넓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첫 해외여행은 낯선 곳에서의 긴장감때문인지 시선을 점점 나와 아이만을 향하게하고 관계는 좁아지게 만들었다.
떠나기 전에는 미쳐 알지 못했다. 엄마들은 자동반사적으로 내 아이를 먼저 위하게 되고,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언니가 저런 사람이었나?' 싶게 서운한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우리가 함께한 보름간의 여행은 한순간에 이별 여행이 되었다. 찐한 우정이 한 없이 가벼운 풍선처럼 미지의 세계로 날아가 버렸다. 어디로 간 것인지,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우정을 향해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그리웠지만 지금은 붙잡고 싶지 않았다. 그 후 공허한 눈동자로 아침에 눈을 뜰때마다 우리가 여행에서 줍지못한 순간들은무엇이였을까 떠올렸다. 그리고 때마침 안희연 시인의<줍는 순간>을 만났다.
25.06.05(목), 카페핀드에서 안희연 시인의 <줍는순간> 북토크가 열렸다. 박연준 시인의 사회로 두 사람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이번 북토크는 카페에서 이루어진 만남 때문인지 우연히 두 분 옆자리에 앉아 사담을 엿듣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다 마주친 비온 뒤 무지개처럼 눈을 뗄 수 없었고 셔터를 눌러 간직하고 싶었다.
안희연 시인은 삶을 '여행'이라는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여행지로 만난 그 곳에서 ‘시’를 발견하고 싶다고 했다. 이 책속에는 그렇게 여행을 통해 그러모은 무한하고 경계없는 깨달음들이 4개의 파트로 나누어 ‘청춘’, ‘예술’, ‘사람’ 마지막으로 ‘시’ 순서로 담겨 있었다. 어디선가 안희연 시인은 말했다. “우리는 때로 과거의 문장에 취소선을 긋고 새 문장을 적어 넣으며 시간의 의미를 발견한다“ 이 말을 듣고 돌이켜보니 나는 후회스러운 과거와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지우고 새 일상이 펼쳐지길 바라며, 다가오는 시간에 희망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질 때마다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걷고 뛰고, 현실과 아주 먼 곳으로 도착해있을 나를 기대하며 붕뜬 마음으로 종착지를 둘러보면 마치 누군가가 족쇄를 채운 것처럼 한 발자국도 때지 못한 내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다. 여행은 마치 내가 어디로 도망치든 도착지는 결국 현실이라는 허무를 직시시켜주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나에게 여행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붙잡고 싶은 찰나의 빛과 같아서, 때로는 그 허무함 속에서 마주치는 진짜 나의 모습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계속해서 삶은 기어코 나를 다시 낯선 길 위에 세워둔다. 앞으로 도착 하게 될 그 길 위에서는 부디 소중한 것들을 줍는순간 바로 알아차렸으면 좋겠다. 놓치지 않고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느 방향으로 가는 출발선 위에 서있어야 하는지를.
나의 다음 여행지를 상상하다보니 두 분의 줍는 순간들이 궁금해졌다. 안희연, 박연준 시인은 삶의 어떤 순간을 줍고 또 간직할까?
북토크가 시작되기 몇시간 전쯤 박연준 시인은 인스타스토리로 질문을 받으셨다. 오프라인 자리에서 번쩍 손을 들고 질문을 드릴 자신감은 없지만 온라인 공간이라면 수줍지 않아서 질문을 드렸다.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줍는 순간> 에 나오는 인도 여행기에 “사람들은 주로 인도여행을 통해 자신보다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위안을 얻는다” 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부분에서 안희연 시인은 불편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 구절을 보면서 많이 공감을 했었는데 나 역시 타인을 위로할 때 내가 느끼는 묘한 우월감에 안도한 적이 많았다. ‘그래도 상대보다 내가 좀 더 나은 상황이구나, 그래서 위로라도 할 수 있구나' 하는마음이 들어 우열을 가리는 것만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높고 낮음이 없는 각자 고유한 존재인데 매 순간 그것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또한 반대로 타인이 우월해보일때마다 자꾸만 내가 초라해져서 삶의 동력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부질없는 이런 마음이 나이를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도대체 이 못난 부러움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궁금했다. 늘 제자리 걸음이어서, 매일이 녹록치 않아서, 육아도 살림도 잘하는게 없어서, 바라는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도없어서. 그래서 이런 질문을 드렸는데 토크 중간에 마치 시처럼 질문을 읽어주셨다.
그 질문에 대해 안희연 시인은 말했다. “빛과 어둠의 총량은 같다”, “물을 마시지만 물을 침범하지 않는다”라는 문장과, 인도 스님께서 말씀하신 “절대 길거리 아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지 말아라, 영혼이 다친다” 뒤이어 이성복 시인의 문장도 전했다. ”문학이란 그것을 말하기 전에는 모든게 ‘이놈, 저놈‘으로 있다가, 그것을 말함으로써 ’이분, 저분‘의 상태로 드높여지는 것을 말한다.“
안희연 시인의 답변을 듣다보니 존경하는 선배님이 떠올랐다. 선배님은 늘 내게 말했다. 주는사람과 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모든 인간은 주고 받는 관계이고 여쭙고 의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때로는 아이도 길거리 노숙자도 스승님이 될 수 있는 거라고 하셨다. 안희연 시인과 선배님의 말씀들을 떠올리며 같은 총량아래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자선이 아닌 다정함 혹은 고마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했지만 과연 내가 이런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런사람이 되기에는 나는 아직 아득히 먼 곳에서 소갈머리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마도 그리하여 나는 계속 나에게 북토크를 선물하는것 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작은 마음으로 큰 꿈을 꾸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크고 작음의 차이를 느끼며 자주 막막하고 두려운, 그래서 가여운 나를 위해 기쁨을 찾는다. 북토크에서의 기쁨과 깨달음들이 크고 작음의차이를 줄여주고 메마른 마음에 오아시스가 되어주고 있다. 물론 북토크에서 주고 받은 이야기들이 당장 나를 달라지게 만들어주진 않겠지만 내 몸속 어딘가에세포처럼 숨어서 나를 구성하고 살아있게 할 것이라 믿는다.
박연준 시인은 안희연 시인에게 이제 저 먼곳이 아니어도 한자리에서 멀리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온전히 스스로 경험하고 체득한 것들만 쓰는 비약이 없는 시인이 된 것 같아고 말씀하셨다. 나도 이제 한자리에서 멀리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삶을 여행처럼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안희연 시인님이 늘 품고 산다는 ‘탕종’이란 단어처럼 다시 작아저도 부풀어 오르며 회복하고 싶다.
나도 품고 사는 말이 있다. 오늘도 되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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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줍는순간> 안희연 시인 북토크
25.06.05(목), 카페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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