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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기 Oct 15. 2024

2024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지킴이 학교 연수 3

독도가 코앞인데?!

7월 17일까지는 독도를 갔다 온 거 같다. 울릉군 알리미 앱을 보니 현재는 독도 <접안 불가능>이다. 이 배들 중에서 어떤 배가 독도를 갈 수 있을지 초미의 관심사이다.


7시 기상 후 멀리 하늘과 바다를 보며 조식을 먹었다. 제비가 가끔 날아다닌다.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9시 20분에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을 갔다. 2017년 개관한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은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독도를 지켜낸 독도의용수비대의 국토수호정신을 계승하여 체험교육장으로써 전시, 교육, 역사연구 등을 하고 있다.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에 들어가면 바로 만날 수 있는

독도 모형과 <한국령> 글자가 인상적이다.


기념관 내부의 설명에 따르면, 독도의용수비대(Dodo Volunteer Forces)는 ​울릉도 주민으로 구성된 독도 수비대로서 1953년~1956년까지 일본의 불법 침입을

막아내고 독도를 수호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6.25 전쟁 중에 일본의 불법 독도 침입을 막아낸 순수 민간조직이었다. ​울릉도의 청년들은 국가의 부름이나 요구 없이 '독도의용수비대'를 창설했으며 어떤 대가나 보수도 바라지 않고 3년 8개월 동안 독도에 주둔하며 목숨을 걸고 독도를 지켰다. ​이는 전통적인 '의병 활동'의 현대판 출현이라 할 수 있다.


죽도, 은지군 등 일본 해경들이 1953년 독도에 말뚝을 세우고 우리나라 어민을 위협했다는 배경 설명을 들었다. 독도의용수비대의 사진과 당시 이용하던 무기를 눈으로 보았다. 그들의 사진 기록이 많지 않아 아쉽다.




목대포(Wooden Cannon)


설명에 따르면, 목대포(Wooden Cannon)는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이 수차에 걸친 전투를 통해 깨달은 실탄 부족과 열악한 무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만든 무기이다.

수비대원들은 사비로 마련한 아군 화력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동도 정상에 나무로 대형 대포 모형을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이 '목대포'는 1954년 10월 2일 일본의 제4차 침입에서 일본 함정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포격전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후에 일본 언론에 “독도에 거포 설치”라는 기사가 날 정도로 일본 측에 위협적인 존재로 작용했고, 이는 독도의용수비대의 전력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독도의용수비대의 지혜가 돋보인다.




전마선 전복사건

설명에 따르면, 서도에서 동도로 기지를 이전하는 도중에 동•서도의 중간 지점에서 무기를 실은 전마선이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M1 소총 10여 자루와 탄약들이 바다에 잠겼다.

이튿날 이상국, 이규현, 황영문 대원이 맨몸으로 잠수하여, 유실된 무기들을 모두 건져 올렸다. ​동해의 거센 바람과 너울성 파도에 이 작은 배로 소총과 탄약을 옮겼다니. ​참 열악하고 절실한 상황이 느껴졌다.


독도를 지킨 33인의 독도의용수비대원 이름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기억하면 좋겠다.


홍순칠 대장의 모형과 독도의용수비대가 받은 포장과 훈장도 발견했다. 영상관에서는 독도의용수비대와 미망인의 인터뷰 영상을 생생히 들을 수 있다.



안용복기념관


안용복기념관은 조선시대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고자 고군분투했던 안용복의 업적을 기념하고, 그 얼을 국토사랑 정신으로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교육의 장을 마련하 기 위해 조성되었다.

돗토리번은 에도막부에 조선 어민들이 죽도에 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청을 하였다.




울릉도쟁계의 승리

설명에 따르면, 에도막부는 '죽도'가 조선의 '울릉도'인 줄 모른 채 쓰시마번으로 하여금 '본국의 죽도'에 조선인들이 어로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요청하는 서계를 조선 정부에 보내도록 명하였다(1693.11).

이때부터 두 나라 사이에 울릉도와 독도를 두고 서로 자국의 땅이라고 주장하며 영유권을 다투는 '울릉도 쟁계 (일본에서는 '죽도일건'이라고 한다)가 발생하였다.

 

그 사이에 에도막부는 돗토리번의 영주에게 죽도와 송도(=독도), 두 섬이 도토리번에 속하는지 물었다(1695.12).

돗토리번은 두 섬이 돗토리 번에 속한 섬이 아니라고 회답하였다(1696.1.25).

2년이 넘는 조사와 논쟁 끝에 일본 에도막부는 ‘죽도’가 조선의 '울릉도'인걸 알고 '죽도도해금지령'을 내렸다(1696.1).

그리고 ​‘안용복 납치사건’으로 인해 조선정부는 울릉도와 독도에 우리 어민들이 드나들었고 일본 어부 들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적극적으로 일본 에도막부와의 교섭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를 지킬 수 있었다.

'울릉도쟁계'가 진행 중이던 1694년 가을에 조선정부는 삼척 영장 장한상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울릉도와 주변 섬을 조사하였고, ​이후 3년에 한 번씩 울릉도와 주변 섬에 수토관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수토관 파견은 일본으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땅임을 알도록 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안용복사건이 일어나자 숙종은 과거시험 문제에서 일본인이 울릉도를"죽도라고 가칭하고 그 땅에서 우리 백성들이 경계를 넘어가 어채하는 것을 금해줄 것을 청했다"라고 하면서, ​"조종의 강토는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변방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편안히 할 방책을 대책에서 나타내라"라고 하였다.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보며 독도폭격사건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마약?!?! ​어이없는 희생에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석포일출 전망대


길 주변의 나무와 풀이 우거지다. 울릉도의 경사는 평균 20도 정도라는데 여기를 오르는 길은 더 가파르다.

땀이 줄줄.

러일전쟁의 유적지인 석포일출 전망대를 향해 올라가며 전망대 설치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고된 노역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힘들게 올라가 바라본 바다와 하늘의 경관은 정말 멋지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점심은 다애식당에서 오삼불고기를 먹었다.


점심을 먹고 울릉읍사무소에 모여 울릉(사동)항 여객선 터미널로 이동하였다.


독도 손수건 3,000원!

아메리카노 있어요!!

사동에서 독도로 가는 14시 승선권을 받았다. 독도 가는 배를 타는구나! ​커피 한 잔을 하며 긴장된 마음으로 승선을 기다렸다.


드.디.어 독도로 간다! 독도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중 한 명이다. 과연, 독도에 접안할 수 있을까?! 태극기를 보며 물어보았다.


독도를 가는 배는 좌우로 작게 흔들리며 동시에 앞 뒤로도 크게 흔들린다. ​파도를 넘으며 놀이기구를 탄 듯한 느낌이 끊이질 않는다. ​주변에 멀미가 심한 분들이

한 명 두 명 늘어난다.

이런 느낌으로 1시간 30분을 배를 타고 독도로 향해가는 것이다. ​어렵지만 독도를 향하는 사람들의 행보에 의미가 있어 보였다.



독도가 코 앞인데?!

아쉽게도 독도에 접안이 불가능하다는 결과를 방송으로 듣게 된다. ​하지만 독도는 주인공! ​사진 찍는 사람들로 인기 만점이다.


독도 한 컷! 독도를 배경으로 나도 한 컷!


아쉬운 마음 뒤로 하고 다시 울릉도로 향했다. 저녁은 뭐무꼬에서 소불고기전골을 먹었다.


숙소로 다시 돌아왔다. ​아쉬운 마음이 크다. ​울릉도에 오고 독도에 가는 배를 탔지만 독도에 발을 디디지 못했다는 마음이 남아 있다.

파도가 크면 배가 접안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안타깝다.​방파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찾아와서 독도를 눈으로 바라보니 책이나 영상으로만 보던 때와는 다르다. ​실제로 보았다는 경험이 생겼기 때문이다.

독도에 실제로 발을 닿는 경험을 마음먹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니 참 아쉽다.

​독도에 간다면? ​<대한민국동쪽땅끝> 글자를 보고 싶고

독도경비대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 삽살개도 보고 싶다. 천장굴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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