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 위에 남은 시간의 온기
시(詩)처럼 한 잎 두 잎 떨어진다
겨울을 부르는 바람에 우수수 날린다
푸르름의 청춘은 가을빛에 물들고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며
가을을 불태운다.
황혼에 물든 빨갛고 노란 잎들이
죽음으로 대지를 덮어간다
나그네는 일생을 서쪽으로 걷고 있다
서광으로 떠오른 태양을 따라
희망의 그림자가 길게 앞서 걷는다
시간은 흐르고 현실의 그림자는 발밑에 드리우고
서서히 느려지는 발걸음 아래로
지친 그림자는 뒤로 뒤로 길게 눕는다
서쪽 하늘의 붉게 드리워진 황혼의 빛은
서산에 걸린 태양과 함께
화려함을 불태우고 이내 사라진다
낙엽의 흑색 옷을 입고 사라져 간다
나그네 앉았던 빈자리를 남겨두고.
그 빈자리는 말없이 시간을 품는다.
낙엽이 쌓여 만든 잠시의 의자였을까,
가슴의 공허를 덜어낸 작은 쉼표였을까.
그 자리엔 느려진 발걸음이 남긴
희미한 온기만 잔존할 뿐,
뜨거웠던 서광도 지쳐 길게 눕던 그림자도
이내 회색빛 낙엽 아래 조용히 숨을 죽였다.
태양이 끌고 갔던 그 모든 드라마는
이제 차가워진 공기와 흩어진 잎사귀 몇 장으로
'고독의 정물(靜物)'이 된다.
하지만 그 자리가 있었기에
나그네는 다시 서쪽으로 걸어갔으리라.
가을이 끝내 남기고 간 것은
사라짐의 쓸쓸함이 아니라,
다음 해의 푸르름을 기약하는 텅 빈 충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