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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골도 감사할 줄 압니다

당연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

by 백재민 작가

피부가 뒤집어졌다. 환절기 탓인지, 밤새워 논평을 쓰고 댓글창을 들여다보며 쌓인 독기 탓인지 모르겠다. 나는 만성아토피피부염을 앓고 있다. 만성염증 증세가 심해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지면 가장 먼저 신호를 보내는 곳이 피부다. 참지못할가려움이 전신에서 일어나면, 정치고 나발이고 당장 이 고통을 멈추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털 덮힌 피부를 긁어대는 곰이 되는 기분이다.

익숙하게 매주 가는 동네의 오래된 피부과를 찾았다. 희끗한 머리의 의사는 늘 그렇듯 말이 없다. 청진기를 대거나 환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법도 없다. 진료차트와 긁어 부스럼이 난 내 팔뚝을 번갈아 보더니, 상세한 설명 한마디 없이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진료가 끝났다는 표시를 한다. 불친절하다면 불친절한 이 30초짜리 진료가, 그날따라 묘하게 안도감을 주었다. 진료를 받고 약을 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인생의 나락 끝에도 희망은 존재한다는 증거 같았기 때문이다.


처방전을 받아들고 약국으로 향하면서 지갑 속 체크카드를 만지작거렸다. 궁상맞은 생각이긴하다만...건강보험이라도 있어서, 본인부담금 몇천원으로 이 지옥 같은 가려움을 멈출 약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들더라. 그리고 그 몇천 원을 낼 수 있도록 내 뒤를 봐주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도 감사했다.


22세 강도영씨는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의 병원비가 없어서, 복지사각지대에서 여기저기 돈을 빌리다 결국 아버지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온 국가정책이 삶과 죽음을 갈랐다. 우리는 취직이든 사업이든 도전하고 실패할 때가 종종 있다. 그 실패로 인해 모든 것을 잃지않도록 방지하는 안전장치가 사회복지이며 복지정책이다. 강도영씨와 그의 아버님께서는 그 제도 밖에 위치해있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내가 누리는 이 '사소한' 치료가, 과거의 누군가에게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포항시내에 위치한 카페 '백금당'. 분위기가 참 좋은데 내 주머니 사정엔 좀 비싸다... 또르르...

약국에서 약을 받아 들고 집으로 가는 길, 참지 못하고 근처 카페에 들렀다. 카페 화장실거울 앞에 서서 급히 약을 바르고 항히스타민제 두어 개를 삼켰다. 화끈거리던 피부가 진정되고 거짓말처럼 가려움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상이 달라보였다. 팍팍하던 세상이 마치 사람사는세상이라도 된 마냥, 천지개벽한 듯 느껴졌다. 살짝이 노르스름하게 보이던 하늘이 맑아지고, 날카롭게 날라와 귀에 꽂히던 소음이 백색소음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커피 한잔 마시며 숨까지 고르니 세상보는 시선이 이리 아름답게 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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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릿출신 글쟁이. 넓은 스펙트럼을 지향하는 이단아. 평론과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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