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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잔고 16000원의 정치

리어카의 무게를 나누는 법

by 백재민 작가

※ 대문이미지는 제가 직접 찍은 사진이긴 합니다만, 가을즈음에 찍은 사진입니다. 이글에서 언급한 어르신이 아니라는 점 언급하고 넘어갑니다(또한 어르신의 초상권을 위해 블러처리해드렸습니다).



한 주의 일과를 마치고, 월요일 오후의 나른함을 핑계삼아 카페에 들렀다. 카페 앞 흡연구역, 연초에 불을 붙이려는데 눈앞으로 거대한 산이 지나갔다. 사람의 키보다 높게쌓아올린 누런 폐지더미. 그 아래, 제 몸집보다 몇 배는 큰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가는 굽은 등이 보였다. 할머니였다.


숨이 턱 막히는 땡볕이었다.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강렬하게 피어오르는 이 날씨에, 저 무거운 리어카를 끌고 어디까지 가시는 걸까.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불편해서다. 저 고단한 삶을 마주하기에는 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혹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 그랬다. 나 자신이 '좌파'네 '진보'네 내세우고 다니지만, 막상 현실의 비참함 앞에서는 외면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작은정부론'이니 뭐니 하며 입으로는 거창하게 떠들었지만, 내 논리가 저 리어카를 끌고 가는 할머니의 먹고사는 일과 무슨관계가 있나하는 생각에 현실을 마주하기 싫었던 것 같다.


"할매요! 잠시만요, 날이 너무 덥습니더. 시원한 거 한 잔 사드리고 싶어서요."



할머니는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점잖게 사양하는 할머니를 기어코 붙잡아 세워두고 카페로 뛰어 들어갔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장님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사장님,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요? 시원하고 맛있는 걸로요."


사장은 '아이스 블루베리 레몬차'를 추천했다. 그런데 메뉴판 옆의 가격표를 보니 음료가격이 5,500원이다.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통장 잔고는 16,000원. 전 재산의 3분의 1이 날아가는 셈이다. 그 짧은 찰나, '아메리카노는 더 싼데...' 하는 생각이 앞선다.


가족의 도움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이어가는 스스로가 철없이 남에게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하니 한심했다. 그런이유로 밖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기다리는 할머니를 두고, 고작 몇천 원에 저울질을 하는 꼴이라니. 나는 '건실한 청년'이 아니었다. 커피와 담배를 즐기는 골초중의 골초였고, 그저 5,500원 앞에서 벌벌 떠는, 거리에서 마주친 할머니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가난한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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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릿출신 글쟁이. 넓은 스펙트럼을 지향하는 이단아. 평론과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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