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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희 Oct 15. 2024

치사해, 하지만 훌륭해 : <조커2, 폴리아되> 리뷰

<조커, 폴리 아 되> 리뷰 및 감상평 및 분석문 혹은 단평



<조커 : 폴리 아 되> 리뷰, 감상평, 분석문, 단평

*영화 본 평범한 관객1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조커>, <조커 : 폴리 아 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12년, <어벤져스> 속 영웅들은 대한민국은 물론 전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정의로우면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삶과 결핍이 있는 영웅들은 특유의 인간적인 매력에 덧불어 우리 모두가 되고 싶어하는 '워너비' 인간상의 면모를 보여주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2019년, 그로부터 7년이 지난 뒤 <조커>가 그에 버금가는 열풍을 불러 일으키며 혁신적인 히어로물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2024년 지금, <조커2 폴라아되>는 뜨거운 인기를 손에 얻었던 전작과는 비교적 다른 결의 서사를 선보여 일부 대중으로 하여금 물음표를 짓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그에게 열광했던 이유



 요즘 미디어물에서 인기 있는 소재는 바로 '사적 복수' 혹은 '욕망에 충실한 주인공'이다. 근래 흥행한 작품들 속 주인공을 보면 주인공이라 해서 무조건적으로 선하지 않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히어로물은 유독 그 시대의 사회 분위기, 사람들의 가치관 변화에 따라 크게 좌지우지되는 듯하다. 물론 예술작품의 모든 인물들이 그 시대의 대중이 어떤 인간상을 원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히어로물이 유독 그러한 특징이 더 도드라지는 듯하다. 이를테면 한때는 <슈퍼물>처럼 무조건적인 먼치킨 캐릭터와 정의로운 주인공이 인기였지만, <어벤져스>에 이르러서는 주인공이 바람둥이이기도 하고, 마녀가 되어 모두를 휩쓸어버리기도 하니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하다. 갈수록 살기 퍽퍽해지고 진정한 악인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는 이 세상에서 대중은 이렇게 착해빠진 영웅을 보고 큰 거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제는 '저렇게 착한 인간이 어딨어'부터 시작해서, '저렇게 착하고 정의로운데 악인을 싹 물리친다고? 누가 믿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 주인공 인주는 자신이 횡령한 검은 돈 700억을 갖기로 결심하고 드라마의 아크 플롯은 바로 이 700억을 갖기까지의 그녀의 여정이다. 옛날 같았다면 "저런 나쁜 인간이 주인공?" 했겠지만, 악인은 뒤로 숨고 제대로 된 처벌 받지 않는 이 세상에서 대중은 차라리 이토록 솔직한 주인공, 이토록 욕망에 진솔하게 행동할 줄 아는 주인공에 더 현실적인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조커 또한 마찬가지다. <조커1>의 주 내용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환경에 처해있는지, 그로 인해 어떻게 그가 조커가 되어가는지 그 과도기를 그린다. 조커는 그야말로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인 모서리, 그 구석에 방치된 한 인간의 '그럴 수밖에 없던' 몸부림 그 자체다. 우습게도 그의 개그에도 그의 삶에도 아무런 관심 없던 사람들은 그가 조커라는 캐릭터가 되어서야 그를 집중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한다. 그것이 비난이든, 추앙이든. 그렇게 <조커1>은 사회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그가 조커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 과정을 촘촘하게 그려냈고, 그로 인해 전 세계는 마치 이 세계에 정말 조커가 나타난 것처럼 극과 극의 반응들로 나뉘어 다양한 담론을 이루어냈다.





<조커 : 폴리 아 되>에서 달라진 점은?



<조커1>에서 어두운 빌런이자 히어로로 되어가는 그의 과정을 그려냈다면 <조커2>는 그 뒤, 조커라는 캐릭터에 갇힌 그의 밑바닥의 내면을 밝힌다. 전작에서도 조커이기 전에 아서 플렉이라는 한 인간의 삶에 대해 깊게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볼 때 그는 조커라는 캐릭터가 되어 대중들로 하여금 비릿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게 하며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 느꼈을 이 사회의 부조리를 각각 떠오르게 하여, 흔히 말하는 대리만족 심리를 선사해준다.


 조커라는 IP가 흥행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무조건 한 번씩은 겪었을 이 사회에 뿌리 깊게 내린 부조리, 이를테면 자본주의의 불균형, 여전히 존재하는 신분제도, 차별, 혐오, 폭력 등등 말이다. 극 중 조커는 이러한 부조리를 거의 모두 겪게 되고 감독은 그 처절한 모습을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로 인해 대중은 조커를 보며 "나도 저런 적 있었지"하며 무의식 중 공감하게 되고, 끝내 결국 조커가 되어 쿠데타를 일으킨 그의 모습을 마냥 빌런으로만 볼 수 없게 된다. 나 또한 몇 번이고 참았을 것이고, 나 또한 몇 번이고 조커가 되어 이 지긋지긋한 부조리 속에서 할 수 없는 일탈을 해보고 싶었을 테니까. 그러한 점에서 <조커1>은 대중은 우리 내면에 각각 존재하는 무의식 속의, 뭐랄까, 불쾌하고 끈덕진 열등감 내지는 무시의 경험을 진솔하게 찔러서 그 무의식의 욕망을 조커라는 캐릭터로 고스란히 볼 수 있도록 분출해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조커2>가 세상에 나왔다. 놀랍게도 대중의 반응은 1에서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극명하게 나뉜다. 그 이유가 무엇일지 우리는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편과 지극히 다른 평점, 그 이유





1) 뮤지컬 시도

1편에서의 분위기와 콘셉트는 그대로였다. 그대로되, 달라진 점은 바로 노래가 삽입되었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러한 시도가 처음엔 낯설었으나 몇몇 장면에서 보이는 뛰어난 미장센에 사로잡혀 '의외로 괜찮은데?'라는 말을 했다. 이를테면 조커와 할리퀸이 화재를 낸 뒤 함께 비 속에서 춤을 출 때. 조커와 할리퀸이라는 캐릭터들 자체가 워낙 웹툰적인 요소가 강하고 우리 현실 속의 나쁜 인간들 느낌보다는 정말, '캐릭터'로 느껴지는 것들이 강해서 그러한 장면들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물론 '조커'가 아니라 아서 플렉이 노래를 부를 땐 이질감이 상당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조커'는 웹툰 캐릭터로 손색이 없어 그가 춤을 추든 노래를 하든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처절한 인생을 살아온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어쩌면 우리 무의식 속에는 있을 법한 '아서 플렉'이 노래를 부르면 당연히 부자연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관객이 조커, 아서 플렉을 받아들이는 무의식의 시선은 아래와 같다.



조커-캐릭터 / 아서플렉-인간



조커일 때와 아서 플렉일 때 그의 성격와 대사톤은 완전히 달라진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정말 자아가 2개인 것처럼 보인다. 그로 인해 관객은 당연하게도 아서 플렉이 우중충한 감옥 속에서 갑자기 노래를 부르며 마이크를 쥐면 그 부자연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물론, 아쉬움은 남았다. 우선 넘버를 지나치게 많이 넣었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될 장면 같은데 노래를 부른다거나... 그러나 이것은 그래도 넘어갈 법했다. 레이디 가가의 노래 실력이 워낙에 출중했고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력이 그에 너무도 잘 어우러졌기 때문에. 그러나 그 둘의 열연 열창조차 이기지 못한 문제점이 있다.


문제는 '루즈한' 노래들.

한참 심각한 상황이 이어지고 관객은 그에 완전한 몰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두운 무대에서 천천히 조명이 켜지더니 느릿느릿 조커와 할리퀸이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바로 이러한 장면들에서 필자는 몰입이 끊기는 느낌을 받았다. 뮤지컬을 도입함으로서 조커-할리퀸의 웹툰, 코믹적인 캐릭터성은 더 살리고 훌륭한 미장센 또한 나올 수 있었으나 이러한 장면들은 외려 극중 몰입을 방해했다.


둘의 정신 상태로 봐선 이런 뮤지컬적인 요소가 자연스럽게 연상되긴 하다만, 차라리 도입부부터 그렇다면 신나는 절정의 노래 장면을 보여주었던가, 조금 다른 연출을 노렸다면 좋았을 듯하다. 아서 플렉이 막판에 말한대로 "제발 노래 그만 부르고 말을 해"라고 할 만큼 필자는 해당 영화의 뮤지컬 요소에 큰 거리낌은 없었는데, 다만 이러한 장면들이(루즈한 노래, 굳이? 싶은 무대 연출들) 조금 더 재미있게 연출되었다면 혹은 아예 삭제되었다면 정말 훌륭한 뮤지컬 영화가 되었을 듯하다.




2) 주 무대는 재판장?

2편에서의 주 무대는 바로 재판장이다. 1편에서는 다양한 장소들이 나왔으나 2편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 장소는 재판장이다. 필자는 이것이 조금 아쉬운 선택이란 생각이 든다. 아서 플렉 그의 인생을 생각하면 당연히 범죄를 저지른 후 재판을 치러야 하는 것은 맞지만, 조커로 보았을 때 재판장은 조커를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꽁꽁 묶고 한계를 지어버리며 그의 캐릭터성을 확 죽여버린다. 물론, 후에 이것에 대해 말할 테지만 감독이 "난 이걸 노렸어! 왜 당신은 조커라는 캐릭터로만 그를 생각하지? 왜 아서 플렉에 대해선 보지 않지?" 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만, 나는 그의 인생은 둘째치고 팬들이 열광하던 코믹북 속 조커의 '캐릭터성' 그 IP 자체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서 플렉이 어떻든 간에, 결국 관객이 봐왔던 조커라는 캐릭터는 이렇고 저렇다라는 어떠한 관념들이 있다. 총을 쏘는 미치광이? 돈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을 원하는 특이한 빌런? 감독이 조커라는 캐릭터에만 그를 가두려고 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메시지는 아주 잘 느껴지지만, 문제는 재판장이라는 장소를 극의 절정까지 이끌고 갈 필요까지 있었냐는 점이다.


조커가 재판장에서 직접 자신을 변호하며 변호사 행세를 하는 것은 재미있긴 했으나 그가 하는 말들은 조커인지 아서 플렉인지 헷갈리고, 그의 변호 또한 조커답지도, 아서 플렉답지도 않고 이도저도 아닌 느낌이 든다. 조커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예의 바르고 아서 플렉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미치광이 같다. 감독 또한 조커를 현실적인 조커로 다룰 것인지-다크나이트에 등장했던 히스레져의 조커처럼 어느정도 웹툰 같은 인간으로 다룰 것인지 혼동이 오지 않았을까 싶다. (나 혼자만의 생각.)


필자 또한 2편을 볼 때 계속해서 혼동이 오던 것이 바로 '조커는 변호사가 말하는 대로 정말 이중인격자인가?'였다. 결론으로 보자면, 아니었다. 아서 플렉은 조커 따위는 없었고 연기를 한 게 다라고 하는데 (...) 여기서 기존에 우리가 알아오던 조커라는 캐릭터성 자체가 무너진다. 그러니까 감독은 조커를 다루기 이전에 정말 아서 플렉이라는 불쌍한 인간의 삶을 먼저 다루고자 했던 점이 여기서 여실히 드러난다.


필자는 해당 장면에서 물음표를 지울 수 없었다. 그의 삶을 다루고 우리가 진정 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하는 감독의 메세지는 충분히 알겠다만, 굳이 조커라는 이미 만들어진 훌륭한 IP를 '사실은 다 연기였다'라는 갑작스러운 설정 추가를 하면서까지 다룰 필요가 있었는가 의문이 든다. 물론 이 또한 감독이 "그걸 의도한 거였고 우리의 사회에서 조커란 없다 대중이 만들어낸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할 말 없다. 이에 대한 것은 밑에 말하도록 하겠다...





3) 죽여야만 속이 후련했냐

결말을 보고 '왜, 굳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러닝타임 내내 너무 강렬히 느껴졌는데 해당 결말에서 "난 이걸 말하고자 하는 거야!"라는 것이 너무도 강렬하고도 노골적으로 느껴져 기분이 묘했다. 감독의 메시지로만 보자면 이것은 더할 바 없는 훌륭한 엔딩이라 생각한다. <기생충>처럼 일말의 희망도 없다는, 잔인한 대중과 사람과 그로 인해 결국 초라하게 죽고야 만 한 인간을 고스란히 보여줬으므로 정말 잔인한 결말으로도 보이지만 그의 메시지로만 본다면 이보다 더한 결말은 없을 거다.


그러나 문제는 해당 영화 속 등장하는 주인공은 이미 십 여 년 간 수많은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도 남은 조커라는 아주 특이하고도 특별한 캐릭터라는 점이다. 조커라는 캐릭터가 지닌 웹툰적인 특징과 그의 광적인 성격-그의 본체인 아서 플렉의 처절한 삶, 감독은 후자를 비추기를 선택했고 결론적으로 조커는 대중에게 캐릭터로만 소비되어 죽고야 만다. 이러한 잔인한 엔딩은 마치 "내가 원했던 조커는 이게 아냐"라고 말하는 듯한 관객에게 진정 당신이 봐야 할 것은 캐릭터가 아니라 그 속의 인간이다! 라고 내지르는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든다.

정말 굳이 죽여야만 했나. 너무도 매력적이고도 불쌍한 그의 삶을, '잔인한 대중'이라는 메시지를 보여주기 위해 그리 초라하게 죽여야만 했나. 이조차 더 깊은 차원으로 보자면 대중에게 소비될 뿐인 조커, 그러한 대중을 비판하기 위해 조커를 소비해버린 감독, 이라는 구도로도 보인다. 결국 조커는 누구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감독에게마저 죽임으로서 소비되었다. 어쩌면 이 또한 감독이 의도한 극의 완성인 것일까.





치사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영화



이 영화는 치사하다. 그게 무슨 말이냐하면 관객에게 그 어떤 비판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조커2>의 평점은 전작보다 현저히 낮은데 낮은 별점을 준 관객들의 주된 이야기는 "내가 알던 조커는 이게 아냐" 였다. 바로 그것이 이 영화의 메세지임은 확실하다. 감독은 꾸준히 조커가 아니라 아서 플렉을 비추며, 조커라는 캐릭터를 단순히 사회적 혼란과 쿠데타를 위해 이용하기 시작한 대중을 비추고 그 캐릭터에 점점 잡아먹혀가는 그의 인생을 꾸준히 이야기하고 있다. 극이 시작하기 전 상연되는 짧은 애니메이션이 그렇다. 그림자가 홀로 사고란 사고는 다 치는데, 결국 매질을 맞는 건 그림자가 아니라 조커 본인이라는 것. 본편 또한 조커라는 캐릭터가 사고란 사고를 다 치면 본체인 아서 플렉이 결국 처벌을 받고 최후를 맞이한다.


 대중은 아서 플렉이 아니라 쿠데타를 일으켜준 '사이다 영웅' 조커에게 열광할 뿐이고 지배층들은 감히 반항을 일으키려 하는 조커와 아서 플렉 그 자체를 혐오한다. 감독은 계속해서 잔인한 장면을 보여주며 아서 플렉의 삶을 보인다. 필자가 제일 잔인하다고 느낀 장면은, 1편에서 그의 심리 상담을 해주었던 상담가가 증인으로 서서 사실 유년기 시절 아서의 어머니가 그에게 해주었던 "사랑한다, 넌 제일 소중하단다"라는 이야기들은 모두 거짓말인데 본인은 아직까지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라고 말한 점. 영화를 보는 내내 아서가 너무나 불쌍하고 가여워서 수없이 눈물 흘렸는데 이 장면에서 숨이 막히는 듯한 고통을 같이 느꼈다. 잔인하다. 이토록 단 한 움큼의 연민도 없이 아서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울 수가 있을까?





달라진 할리퀸

많은 관객은 <조커1>의 엔딩처럼 아서가 완전히 조커가 된 후 본격적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을 원했겠지만 전혀 아니었다. 심지어 트레일러에선 할리퀸과 조커의 로맨스 영화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할리퀸은 조커가 계속해서 그 캐릭터 속에 살 수 있도록 유도하고 그의 가면을 좋아했을 뿐 비굴하고 불쌍하고 마른 아서에겐 전혀 관심 없었다. 결국 할리퀸은 우리의 희망을 짓밟았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라는 말을 하며 그를 매정하게 떠난다. 많은 관객이 눈치챘겠지만 이 장면은 노골적으로 감독이 할리퀸을 대중을 상징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필자는 이 장면에서 또 한 번 '굳이' 싶었다. 할리퀸과 조커라는 캐릭터 자체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그래, 그러고 보니 그들의 삶엔 내가 관심이 없었네"라는 생각을 하도록 해준 것은 좋았지만, 조커 할리퀸 이전에 그들 내면의 '인간' 자체를 좋아하던 팬들 또한 많았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할리퀸과 조커를 이런 식으로 보여준 것은 마치 조커와 할리퀸을 좋아하던 대중과 많은 팬들에게 큰 '엿'을 날려준 것으로도 보인다. 평범하게 그들을 좋아하고 그들의 인생 또한 의미 있게 보던 어떤 대중은 "우리는 캐릭터가 아니라 그 속의 인간을 봐야 합니다!! 정신 차리세요"라고 귀가 터져라 외쳐대는 감독의 고함에 졸지에 조커와 할리퀸이라는 캐릭터만 잔인하게 소비해버린 대중1이 되어버리는 참사가 일어난다.


해서, 이 영화는 치사한 점이 있다. 한때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2>에서도 이러한 점으로 큰 논란이 되었던 것을 들었다. 그 또한 전작에서 이어오던 캐릭터성을 무참히 밟아버리고 감독만의 새로운 메세지를 던지는 게임으로 알고 있는데, 평론가들의 평점은 좋았으나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커2>는 그 정도의 논란이 불거질 작품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매우 훌륭한 미장센에 메세지에, 작품 자체로도 참 잘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이 지닌 메세지 또한 감독만의 짧은 선민의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이 시대에서 진정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제 4의 벽을 깨면서까지 관객에게 절절히 말하는 듯한 진심이 느껴져 그 자체만으로 보아도 충분히 훌륭한 작품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조커와 할리퀸의 캐릭터성을 그렇게 버려가면서까지 메세지를 강조해버려 기존의 그들을 사랑하던 팬들은 좋아하던 캐릭터가 '캐붕'되는 것을 그저 볼 수밖에 없는 데에 불구하고 쉽게 이 영화 별로다 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메세지가 너무나도 강렬하고 정말 이 사회에 필요한 메세지는 맞으니까. 그래서 많은 대중은 이 영화를 쉽게 깔 수 없다. 만약 깐다면, 자신은 마치 "조커라는 캐릭터, 가면에만 취하고 그 내면의 그의 삶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 없어 하는 무지한 대중1"이 되어버린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처음엔 별로군 싶었다가도 감독의 메세지를 뒤늦게 알아채고 "음 그래 좋았어, 명작이었지"라고 의견이 바뀌는 관객 또한 일부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양가감정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말고도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충분히 더 많다. 할리퀸과 조커의 애정선이 충분히 길어진 러닝타임 때문에 깊게 다루어지지 못해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보인다는 점, 계속해서 '잔인하게만' 등장하는 경찰관들의 소모성 캐릭터들이 조금 아쉽다는 점 등등... 그러나 하나하나 다 이야기 하다가는 날을 샐 것 같아 이만 글을 마친다.


대중들이 더 이상 마블의 영웅에 열광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 뜨거운 감자였고 지금도 이슈인 'PC주의'가 그 원인이라는 말도 크지만, 필자가 보기엔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와 사회 분위기, 그에 맞춰 바뀌어 가는 대중들의 가치관도 크게 영향을 끼친 듯하다. 대중들이 원하는 영웅은, 캐릭터와 인물은 시대에 따라 계속해서 바뀌어가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조커는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원하지만 차마 되지는 못할 우리 내면의 어떠한 어두운 자아를 끌어일으켜준 고맙고도 무서운 나쁜놈이다. <조커2 폴리아되>는 여러 모로 어떤 인간이든 동물이든 쉽게 쉽게 이슈가 되고 캐릭터화 되어 온갖 미디어에 떠올려져 수많은 대중의 시선을 받게 될 수밖에 없는 현 시대에 어울리는 작품이다.


우리는 감독이 던지는 메세지에 어떤 면에선 "치사하다" 싶으면서도, "그래도 맞는 말이지"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이 두 개의 모순적인 감정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현재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미디어 콘텐츠물의 레드오션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하나의 방증일 것이다. 해서 필자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별점은 10점 중 8점이다. -1점은 뮤지컬 영화로서의 완성도가 아쉬워서였고, -1점은 메세지 전달에 휘말려 무너진 조커와 할리퀸 캐릭터 때문이다. 나머지 +8점은 감독이 내지르고 있는 그 메세지와 주제가 지닌 절절한 힘이 현재 이 세계에 무엇보다 필요한 비명이기 때문이다.


조커와 할리퀸이라는 캐릭터의 무너짐을 감수하면서까지 토드 필립스 감독이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는 이유는, 여전히 이 사회의 사각지대 모서리 속에서 방치되어가고 있는 또 다른 아서 플렉들을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어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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