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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Oct 17. 2024

원인 아닌 증상들

많은 이들이 한국 국가대표 축구가 실패한 이유를 무능한 협회와 그 무능한 구성원들에게서 찾는다. 마치 협회를 개혁하고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잉여 인간들을 몰아내고나면, 그 즉시 한국 축구는 한 단계 진보를 이루게 될 것만 같다. 물론 협회는 무능하다. 소위 '축구 철학'의 부재를 드러내며 수년째 국제 대회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고, 이미 국대에서 실패한 감독을 석연치 않은 선발 과정을 통해 다시 불러들였다. 청문회에서의 표지 포함 두 장짜리 프레젠테이션과 치러진 결정들의 근거를 누구 하나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모습은 사실상 조직 내부에 무언가 일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역량이 실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스스로를 분식해서 보여주는 일조차 못하는 조직이 다른 일을 잘할 수 있을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설령 어떤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기대하는 형태의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무능은 현상의 원인이 아닌, 오히려 주어진 현실의 조건 하에서 허락되고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협회의 무능은 원인이 아닌 증상에 불과하다. 협회는 유능할 필요가 없다. 유능하지 않아도, 성적이 나오지 않아도, 한국 국대 축구 경기는 언제나 상암 경기장 만석을 보장하는 명실상부 국내 최대의 스포츠 이벤트이고, 협회 자체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예산과 스폰서를 부리는 체육 단체이다. 그리고 사실 사람들은 한국 축구 국대에 대한 기대치가 그리 높지 않다. 경기를 지거나 대회에서 탈락하면 분노하기는 하지만 실망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누구도 한국이 월드컵이나 대륙컵 대회에서 당연히 선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승리에 기뻐하지만, 희박한 가능성에 많은 기대를 걸지는 않는다. 예컨대 "졌지만 잘싸웠다."는 역설적인 관용구는 잘싸워도 이기기 어렵다는 지독한 현실 인식의 증상이다. 졌는데 '잘'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이 일종의 명백한 운명, 또는 현저한 가능성에 맞섰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이기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만 해도 (파울루 벤투가 일각에서 추앙받는 것처럼) 명장이 되고 대패하지 않고 열심히만 해도 '선전'한 게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승리를 쟁취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받아들인다면, 지는 것에 모종의 만족을 느낄 이유는 없다. 가령, 전통의 축구 강국인 브라질, 독일의 축구 팬들은 자국 국대의 패배를 그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일본의 야구팬들도 자국의 야구 국가 대표가 호주, 독일 따위에 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승리가 당연한 것이고, 승리하지 못했다면 잘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한국 축구에 관해서는 모두가 내심 패배에 체념하고 있기에 잘하려고 애쓸 이유가 없다. 미국 농구 국대를 이길 수 없음에 체념 너머의 감정을 느끼는 농구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연의 이치, 우주의 질서에 저항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축구 변방의 주민들은 나름의 성의를 다해 매번 새로운 중심으로 거듭나고자 분투하지만, 변방은 그 정의상 이미 중심에서 배제된 것이기에 변방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즉, 변방의 거주민으로서의 자의식은 그들 스스로가 앞으로도 변방에 머무르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체념 섞인 자각에 다름 아니다.


유무능의 여부가 진정으로 조직의 명운에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가 되면, 구태여 누군가가 지적하지 않아도 변화는 일어나게 되어있다. 실적을 내지 못하는 기업은 망해서 없어지거나 회사의 인적 구조를 조정하여 새로운 상황에의 적응을 도모하게 되고, 성적을 내지 못하는 프로 구단은 감독을 교체하고 선수를 사거나 팔며, 더 나은 전력을 꾸리기 위해 노력한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부적격자는 배제되고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루어진다. 기업은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구단은 승리를 위해 분투하는 데에 그 존재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즉, 단순한 강권이나 결단에 의해서가 아닌, 일종의 진화론적 압력에 의해서 조직은 스스로를 개선한다. 살아남기 위해, 나아가 생존과 번영의 더욱 안정된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은 유능해져야만 한다.


프로 선수의 경기력이 그가 몸담고 있는 리그의 경쟁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머지않아 직장을 잃을 것임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더 낮은 수준의 리그로 적을 옮겨 선수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어쩌면 선수 생활 자체를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 구단의 감독이나 단장도 마찬가지다. 성적을 내지 못하면, 이유와 상황이 어떻든 간에 언젠가는 직을 내려놓아야 한다. MVP 수상자였으나 부상 이후 기량을 회복하지 못해 저니맨으로 전락한 데릭 로즈처럼 한때 최고 수준의 기량을 가졌던 선수들도, 빌 벨리칙, 어반 마이어, 주제 무리뉴 같은 각 종목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거장들조차 '퇴물'로 판명나면 쫓겨나야 한다는 점에서는 예외가 없다. 때문에 프로는 유능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성취에 대한 강한 압력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일정한 비교 우위를 창출해야만 한다. 스스로 남들보다 낫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명해야만, 그들은 프로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지 못하는 프로는 머지않아 경쟁에서 도태된다.


리그의 수준을 막론하고 경기를 뛰는 자체가 어려울만큼 몸이 망가져서 은퇴를 하는 선수는 거의 없다. 단지 더 잘하고 어리고 저렴한 연봉에 더 큰 가능성을 보여주는 다른 선수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뿐이다. 노아 신더가드가 새 팀을 찾지 못하고 있는 건 그가 더이상 공을 던질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한때 95마일 슬라이더를 던졌던 그의 스터프가 더는 특출나지 않게 되어서이고, NFL 러닝백의 평균 선수 생명이 3년을 넘어가지 못하는 건 베테랑 급의 연봉 대우를 해줘가면서 '낡은' 러닝백을 써먹느니, 싱싱한 근육과 인대를 가진 대졸 신인을 루키 스케일 연봉으로 써먹는 게 훨씬 가성비가 좋기 때문이다. 물론 르브론 제임스나 톰 브래디처럼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서까지 최고 수준의 활약을 펼칠 수 있는 선수가 있다면, 그런 선수를 나이 때문에 마다할 구단은 없다. 이런 경우에 그들의 나이는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리그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지표가 된다. 브루스 아리안스가 사실상 은퇴를 확정지은 브래디를 트레이드하기 위한 급부로 다섯장의 1라운드 픽을 요구했던 것처럼, 스스로의 역량을 증명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선수를 모셔오는 데에는 어떤 대가도 아깝지 않다. 즉, 프로를 프로답게 만드는 것, 그들을 유능하게 만드는 요인은 프로라는 지위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이 프로페셔널리즘인지를 규정하는 조건들이 그들을 프로일 수 있게 만든다. 뒤집어 말하면, 이러한 필터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조직은 대외적으로 어떤 이상을 표방하고 있는지와는 관계없이 유능하기는 어렵다. 과거의 중국 슈퍼 리그, 그리고 요즘의 사우디 리그는 자국 스포츠의 부흥을 명목으로 말 그대로 수백, 수천억원대의 연봉을 약속하며 유럽 빅 리거들을 데려오고 있지만, 리그 자체의 경쟁 수준이 터무니없이 낮은 나머지, 선수 생활의 끝을 앞둔 선수들의 노후 자금 공급처로 머물고 있을 따름이다.


흔히 언론의 질적 하락, 그리고 몰락의 원인으로 '기레기'들의 창궐이 지목된다. 조회수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검증되지 않은 가십을 퍼나르는 수준 미만의 언론인들이 언론계를 장악하면서 언론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몰락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실제의 인과 관계는 정반대이다. 언론계가 이미 독점적인 정보 공급자,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지위와 권위를 상실했기에, 유능한 기자가 될 수 있을 인재들이 더는 언론계로의 진출을 지망하지 않고, 언론 자체도 기성 언론과 전혀 다른 문법을 따르는 수많은 대안 언론들과의 경쟁으로 말미암아 성급하고 선정적인 가십 몰이 없이는 생계를 잇기 어렵게 되었을 뿐이다. 모두가 언론의 중립성, 진실성, 공정성과 같은 덕목을 쉽게 입에 담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더이상 언론에 그러한 가치를 기대하지 않는다. 오늘날 레거시 미디어가 철저한 '구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객관성이라는 전통적인 언론의 이상을 따르는 '척'이라도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썰'이 TV 방송 뉴스로 다뤄지며 공론의 중심을 이루는 최근의 광경은 뉴스조차 민중의 유흥에 봉사하는 예능의 문법에 지배 당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실과 견해의 구분을 공공연하게 흐리는 김어준, 가세연과 같은 새로운 오피니언 리더들의 등장과 득세는 각자가 자신만의 확고한 진실을 소유할 수 있다고 여기는 민중의 확신에 찬 자의식을 반영한다. 요컨대, 기레기, 옐로우 저널리즘, 민중 정서를 무비판적으로 대변하여 호응을 끌어모으는 해장국 저널리즘의 창궐은 누구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벌어진 이상 현상이 아니라, 만인이 각자의 대안적 진실을 추구하는 시장의 지배적인 수요에 언론이 적응한 결과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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