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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잃어버린 중심, 인간

인문과 함께하는 과학

by 더블윤
“Your vision will become clear only when you can look into your own heart.
Who looks outside, dreams; who looks inside, awakes.”
“당신의 비전은 오직 자신의 심장을 들여다볼 때에만 선명해진다.
바깥을 바라보는 자는 꿈을 꾸고, 안을 바라보는 자는 깨어난다.”

카를 구스타프 융



인류는 오랫동안 바깥을 향해 진화해 왔다.


더 먼 세계를 보기 위해 갈릴레이는 굴절망원경을, 더 깊은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현대 과학은 거대한 입자가속기를 만들었다. 뉴턴은 사과의 낙하에서 만유인력을 발견했고, 허블은 성운 속에서 은하의 팽창을 보았다.
과학의 관심사는 항상 먼 곳과 깊은 곳에 있었고, 우리는 더 큰 세상을 보기 위해 시선을 외부로 향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작 ‘우리 자신’은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점점 흐릿해졌다.

문명이 진보할수록 인간은 중심에서 멀어졌다.
코스모스를 담아야 할 과학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었고, 수단이 된 과학은 점차 인간과 조화로부터 멀어져 갔다.
기계가 감정을 모방하고, 데이터가 감각을 대체하며, 알고리즘이 의사결정을 대신하는 오늘,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조차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과학이 선사한 기술의 달콤함 속에 파묻혀 하루의 쾌락만을 추구하고, 지식은 무기가 되어 타인을 멸시하는 도구로 쓰이며, 알고리즘의 추천을 사회의 보편적 가치라 착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에서 혐오와 갈등, 분열이 시작된다.

인간은 분명 진화해 왔으며, 또한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젠 진화의 방향을 다시 바라보아야 할 시점이다.
진화는 더 이상 능력의 확장이 아니라 존재의 성찰로 향해야 한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보다, 왜 그것을 하려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어야 한다.


과학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도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인류의 더 밝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각'이며, 우리가 등한시했을지 모를 '인문'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인류의 문화'를 뜻하는 인문, 또는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세계를 연구하는 학문과 사유’를 말한다.
자연을 다루는 자연과학과 달리, 인문은 인간의 생각·감정·문화·가치를 주로 탐구한다. 간단히 말해, 자연과학이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밝힌다면, 인문학은 그 세계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분야인 것이다. 즉, 인문학의 중심엔 인간에 대한 성찰이 담겨있다.


과학이 세계를 이해하는 속도를 높였다면, 인문은 그 속도를 어디로 향하게 할지 결정했다. 그래서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던 시기마다, 인문적 사유는 그것의 방향타가 되어왔다. 다시 말해, 과학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킬 때, 그 변화의 질을 결정한 것은 언제나 인문적 성찰이었다.
기원전 5세기,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한 문장으로 당시 자연철학이 잊고 있던 질문을 되살렸다. 이는 단순한 지적 명제가 아니라, 과학과 철학이 인간성의 토대 위에 서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들은 예술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해부도를 그릴 때 단순한 해부학적 지식만이 아니라 인간의 구조와 생명을 향한 경외를 함께 담았다. 그의 스케치에는 과학적 정확성과 미학적 아름다움이 공존했다.
18세기 계몽주의의 뿌리에는 인문주의가 있었으며, 그 당시 민중들은 뉴턴 역학을 받아들이면서도 ‘인간과 사회의 진보’를 주제로 삼았다. 볼테르와 루소, 칸트 같은 사상가들은 과학이 사회 정의와 도덕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반대로, 과학이 인문적 제동 없이 폭주했을 때 인류는 파국을 맞았다.
20세기 초 독일의 과학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나치 체제 아래 그 성과는 대량살상과 인종학살의 도구가 되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탄생한 원자폭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앞당겼지만, 동시에 인류를 핵전쟁의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과학은 ‘할 수 있는 것’을 해냈지만, ‘왜 하는가’는 묻지 않았다.




오늘날도 과학의 폭주 위험성이 내재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과학이 직면한 윤리적 문제들은 기술의 발전 속도가 인간의 가치와 제도, 법적 규범을 따라잡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인공지능은 이미 의료, 금융, 국방, 행정 등 삶의 핵심 영역에 깊숙이 들어왔지만, 그 결정 과정은 불투명하며, 편향된 데이터에 의해 차별을 재생산할 위험이 있다. 자율무기 개발은 전쟁의 주체를 인간에서 기계로 옮기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며, AI의 확산은 노동 시장을 재편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

생명과학 분야에서는 CRISPR 같은 유전자 편집 기술이 인간 배아 조작, ‘디자이너 베이비’ 논란을 불러왔고, 유전정보의 소유권과 프라이버시 문제 역시 첨예하다. 멸종종 복원 프로젝트와 같은 시도는 생태계와 자연 질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여전히 불확실하다.

환경과 기후 문제 또한 과학윤리의 중요한 영역이다. 화석연료 사용과 무분별한 개발 사업은 기후 위기를 가속화시키고, 탄소배출 감축 책임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불평등을 드러낸다. 빅데이터 시대에는 개인정보 보호와 감시사회 위험이 커지고, 데이터가 상업적·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의학과 제약 연구는 피험자 권리 보호와 신약 접근성 문제를 안고 있으며, 생물학적 무기의 개발 가능성은 전 인류의 안전을 위협한다. 심지어 우주 개발조차도 달과 소행성 자원 채굴의 소유권, 우주 쓰레기, 군사적 목적의 우주 기술 활용 등 새로운 윤리적 갈등이 예상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이기와 편견, 혐오와 파괴의 충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학의 속도는 빛과 같지만, 우리의 내면 성장은 여전히 더디다. 인문은 과학과 함께, 또는 과학에 앞서 존재해야만 이전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AI의 의사결정은 기술자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윤리 기준과 합의 위에 세워져야 한다. 또한 유전자 편집은 가능성 이전에, 생명의 존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결국 오늘날의 과학윤리는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보다 “기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과학이 인문과 결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술은 스스로 방향을 정하지 못한다. 그것을 어디로 이끌 것인지는 전적으로 인간의 가치관과 선택에 달려 있으며, 이 선택이야말로 미래 문명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이 된다.




인문학의 가장 큰 가치는 '성찰'과 '내면의 성장'에 담겨있다. 그 힘은 과학에 속도를 줄 수도, 방향을 바꿀 수도 있는 유일한 나침반이다.
과학이 ‘사실’을 제시한다면, 인문은 ‘가치’를 제시한다.
과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동안, 인문은 “왜 그것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 질문이 빠진 과학은 목적지를 잃은 항해와 같다.

과거 인문과 과학이 함께했던 시기, 문명은 성장뿐 아니라 성숙도 이루었다.
중세 이슬람의 바그다드 ‘지혜의 집’에서는 수학자, 의사, 천문학자가 함께 철학자이자 시인이었다.
20세기 중반, 노버트 위너는 사이버네틱스를 제안하면서도 인간성의 파괴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는 과학자의 책상 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붙여두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AI의 코드 안에 철학을, 유전자 지도 속에 윤리를, 데이터 네트워크 속에 공존의 원리를 새겨 넣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은 인간의 손을 떠나, 그 목적과 주인이 불분명한 힘으로 변할 것이다.




우리는 고도로 발달한 기술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의식은 얼마나 진화했는가?
아직도 이기와 편견, 혐오와 파괴의 충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 존재는 진정 이 문명을 다룰 자격이 있는가?


우리가 향해야 할 진화는 이제 능력의 확장이 아니라 존재의 성찰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보다, 왜 그것을 하려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어야 한다.

과학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도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인류의 더 밝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찰이며 과학과 인문이 결합된 의식의 진화다.

이제 우리는 외부가 아닌, 내면으로의 진화를 시작해야 한다.
의식의 진화, 감정의 진화, 윤리의 진화,
그 모든 것은 새로운 문명을 위한 필연적인 조건이 될 것이다.

과학은 진리를 추구한다. 그렇다면 인간 또한 자신 안의 진리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그 준비 없이는, 어떤 문명도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스스로 우리 심장 안의 중심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돌아가야 다시 질문하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설계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의 가고자 하는 길 끝에 ‘우리 자신’이 있는가?


이 끝없는 물음이 우리의 길을 온전한 길로 인도할 것이다. 다시 코스모스를 되찾는 이 길 위에서 과학은 인문과 만나야 하며, 그 만남이야말로 새로운 인지혁명의 또 다른 진화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인지혁명은 과학자가 철학을 배우고, 철학자가 기술을 이해하는 교육에서 시작될 수 있다. AI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과정에 윤리학자가 참여하고, 유전자 연구실에 생명철학자가 자리해야 한다.


문명의 다음 도약은 이 경계 없는 협력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니 결국, 코스모스를 되찾는 길은 결국,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다시 묻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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