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군투교생기
사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꿈은 거의 꾼 적이 없다.
안타깝게도 요즘처럼 다양한 꿈을 가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우리 아빠는 교대 등록금을 대준 동생을 늘 언급하며 내가 막내 고모처럼 되기를 바랐다. 다행히 대학 시절 과외를 하며 가르치는 일이 재밌어져서 교사의 길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과외 수업받던 아이들보다 과외를 하는 내가 수업에 더 절실했던 걸 느꼈다. 특별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따라 대학내일 쪽기사에 야학이라는 글씨가 눈에 크게 들어왔다. 무작정 찾아간 곳은 면목동 근처 구에서 운영하는 두드림 청소년 야학이었다. 이곳은 학교밖 아이들을 위한 곳이었다. 과외에 회의를 느낌과 동시에 곧 있을 임용 면접에 경험을 풍부하게 말하고 싶은 다른 속내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젊은 날의 열정이라고 해두고 싶다. 최저시급도 없이 센터에서 주는 교통비만 받고 1년을 근무했다.
학교를 마치면 주 2회 면목동으로 달려가 수업준비를 했다. 친구들은 그 시간에 임용준비에 힘쓰라 했지만 나는 이미 이곳에 정들어 버렸다. 학업에 소외되고 외면하는 아이들에게 공부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청소년 야학에서 노래방비 내주고 어르고 달랜 1년의 울고 웃은 시간들이 나를 또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마지막 학기 교생 실습을 집 근처 모교가 아닌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00 공업고등학교로 정했다. 20대에 나의 열정은 태양보다 더 뜨거웠다.
교생 실습 첫날이 되었다.
교장실의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15명의 교생들이 마주 앉았다.
인상 좋으신 교감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그 뒤로는 남색 등산복 지퍼를 목 위까지 올려 입으신 선생님께서 얇은 알루미늄 막대를 들고 따라오셨다. 매서운 눈빛이 누가 봐도 ‘나 학생부장요’라고 얼굴에 쓰여 있었다. 15마리의 병아리들은 모두 일제히 수첩을 펴고 귀를 쫑긋 세웠다. 교감 선생님의 짧은 환영사가 끝나고 학생부장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자 다들 적으세요. 2-1반 신민준 중학교 때 교사 폭행 있었고 우리 학교에서 1학년 때 정학 전력 있었고 2-4반 김성래 학폭으로 정학 예정 중입니다. 2-6반 최나라 수업시간에 자주 없어집니다, 실장에게 찾아오라고 하지 말고 교무실로 연락 주세요. 요주의 아이들은 수업할 때 조심하시고 아이들과 너무 친하게 지내거나 선생님들 개인 연락처를 주는 일은 없도록 하세요, 이상.
첫 아침 조회에서 보고를 들은 교생들은 다들 바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심지어 체육 교생으로 온 건장한 남자 선생님도 마른침을 꼴딱 삼키며 이거 뭐야 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2학년 2반을 맡았는데 첫날은 아이들의 환호를 받고 어찌어찌 시간이 지났다.
다음날 아침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민방위 훈련을 가신다고 나에게 오후 종례를 맡기셨다.
-얘들아, 앉아. 제발 앉아. 자리에 앉지 않으면 늦게 끝낸다. 청소는 2모둠이고 검사받고 가야 해. 아니다 선생님이 같이 있을게. 자 그럼…….
하는 순간, 갑자기 한 무더기의 아이들이 앞문으로 들어왔다.
-선생님!!! 우리 교생 선생님 오줌 쌌어요~!!!
당황할 겨를도 없이 아이들에게 질질 끌려서 옆 반으로 갔다.
교탁 앞에서 나무 양끝을 간신히 잡고 달달달 떨고 있는 옆 반 교생의 검은 와이드 팬츠 아래로 흥건한 물이 바닥에 있었다. 나는 그 반 아이들을 내쫓듯이 보내고 여자 애들 몇몇과 대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나보다 두 살이나 많던 그 언니는 다음날부터 교생 실습을 나오지 않았다. 애들 말로는 첫 종례에 엄청 긴장을 했고 언니가 금연 교육을 흡연 교육으로 잘못 말했는데 남자아이들이 휘파람을 불며 –야호! 아싸 선생님이 담배 피우란다!라는 말과 소란에 갑자기 소변을 봐버렸다고 했다. 얼마나 긴장했을까. 아직도 그날 그 언니를 좀 더 보듬어 주지 못한 나를 자책한다. 언니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경찰이 학교에 왔고 다 함께 학교 내부도 샅샅이 뒤졌다. 나중에 언니를 제주도에서 발견했다는 후문만 들릴 뿐이었다.
며칠은 그날 일로 교생들 모두가 표정이 어두웠지만 타인의 일은 쉽게 잊히고 나의 일상은 금세 돌아왔다.
마지막 주에 나는 공개수업을 마치고 반 아이들 상담을 하는 임무를 맡았다.
열흘 동안 친하게 지내서 라포형성이 되어 있긴 하지만 사실 걱정이 되었다.
와 미치겠네! 내 앞날도 잘 모르는데 아이들 상담이라니……. 한숨을 연발하고 있을 때 교실로 첫 학생이 들어왔다. 넙죽한 얼굴에 단발머리를 당겨 꽁지를 묶고 맨날 교실의 칠판에 낙서를 하고 지우던 선희였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 팔짱을 끼더니 선생님이 좋아요라고 수줍게 말했던 아이다. 긴장이 좀 풀렸다. 대충의 가정환경을 알게 되고 부산에 가고 싶은 선희의 체험학습비는 내가 내기로 했다. 그때는 이상하게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다음날 담임 선생님은 나를 불러서 자기가 내겠다고 하셨다.
이번엔 매 쉬는 시간마다 포커카드를 섞고 쌓고 돌리는 형순이었다. 현란한 카드 놀림에 걸맞은 길고 큰 손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들이랑 싸움이 잦다는 이야기를 듣고 -형순아 너는 카지노 딜러를 하면 참 어울리겠다. 근데 손에 상처가 있으면 절대 안 되니 손을 소중히 다뤄줘 라며 상담을 마쳤다.
진우는 드러머가 꿈이라고 했다. 실제로 드럼 스틱을 종일 들고 다니며 교실 벽이랑 책상을 치고 스틱을 빼앗기면 연필, 샤프, 볼펜 상관없이 두 손을 한 시도 쉬지 못했다. 공부에 관심도 없는데 학교에 있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해서 -나도 그렇게 생각해. 차라리 자퇴를 하는 게 어떠니, 홍대에서 드럼 배우며 좋아하는 밴드 생활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진우의 두 눈은 반짝였고 다음 날 학교에 자퇴서를 가지고 왔다. 진우는 나에게 눈썹 위로 손가락 두 개를 올리고 튕기며 학교를 떠났다.
담임 선생님은 나를 불러서 상담은 그만해도 좋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미쳤었다.
진우가 엄마에게 내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라면 선생도 아닌 어떤 정신 나간 교생이냐고 찾아왔을 법한테 나한테 그런 무서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에 감사한다.
교생 실습 마지막 날을 앞두고 나는 친구들과 커피숍에 앉아서 25장의 손편지와 아이들에게 줄 작은 선물을 포장했다. 드디어 끝나는 거냐. 으이그 정성이다 야!!! 퉁명스럽게 말하며 리본을 꽉 동여 주는 내 친구들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마지막 날은 아이들과 울고불고 헤어졌다. 그날 저녁 나는 친구들과 소주를 마셨다. 나한테 없는 기억이지만 내가 와 해방이다! 를 수없이 외쳤다고 한다. 나를 맡아주셨던 담임선생님께서는 자기 학교 임용 공고가 곧 있다고 연락 주셨지만 나는 원서를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냥 일반 인문계 학교 선생님이 되기로 결심했다.
처음 근무한 중학교에서는 심심할 정도로 아무 일이 없었다. 물론 여러 가지 업무와 서식을 배우느라 정신없었지만 밤톨 같은 아이들은 정말 귀여웠고 나는 그냥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싸이월드 방명록에 비밀글이 달렸다. -선생님 저 형순이에요. 기억하세요? 저 강원관광대 카지노학과 합격했어요. 선생님한테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건강하세요.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린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불안정하며 나 역시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겪었다. 심지어 타인의 선택에도 관여를 했다. 나는 가끔 내가 그때 가지 못한 길을 궁금해하며 그랬으면 어땠을까를 상상하지만, 지금의 삶도 꽤 괜찮다며 만족을 한다.
과거의 나보다 좀 더 나아진 나는 앞으로 내게 있을 수많은 길을 마주할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선택한 길에 충실할 것이며 오늘처럼 가지 못한 길을 가끔 상상하며 미소 지을 것 같다.
-얘들아 잘 지내지? ^^
※ 글에 나온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