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way
- 엄마! 제 이름 좀 그만 부르면 안 돼요?
밥 먹어라, 옷 정리해라, 겨우 몇 번 부른 거 가지고 아들이 불만을 터트린다.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갑자기 잊고 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아앙~
12년 전 또 하나의 우리라는 간지러운 태명으로 뱃속에 10개월을 살았던 또리가 태어났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남편과 나는 어떤 이름을 지을까? 수없이 고민했다. 시댁은 같은 항렬 돌림자로 ‘은’을 쓴다고 했다. 딸이라면 가나다라, 도레미파솔을 앞에 붙여도 예쁠 이름인데 아들이라는 성별을 알고는 파은 리은 바은 게은 트은…….지나치는 모든 간판에 이름을 붙여보아도 딱히 괜찮은 것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너희가 이름을 정해 오면 한자를 받아주신다고 하셨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주은과 규은이라는 이름을 종이에 적어 어머니께 드렸다.
조리원에서 한창 수유를 하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전화가 왔다.
- 아무래도 주은은 안 될 것 같구나.
메가 스터디에 다니는 아주버님의 회사 회장님의 이름이 손주은이어서 아주버님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게 어머니의 속내임을 눈치챘다.
장남의 회사 상사의 이름을 손주에게 부를 분이 아니지.
'넌 규은이가 되겠구나.' 마음을 먹고 하얗고 부드러운 면포에 쌓인 아들을 보며
“규은아 ~ 규은아 안녕?” 몇 번이고 불러보았다.
벌써 꽤 어울리는 것 같았다.
퇴근한 남편도 조리원으로 입소하고 저녁 시간이 다 돼서야 시어머니가 조리원 휴게실에 도착하셨다.
꽤 커다랗고 두툼한 흰 봉투를 내밀었다.
- 아이 이름과 사주야. 열어봐라.
흰 봉투 안에는 몇 장의 종이가 세 번 고이 접혀있었다.
종이를 펼치니 엄청나게 큰 글씨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 네? 어머니 김춘은이요? 이건 아닌 거 같아요. 어머니 왜 갑자기 춘은이에요?
불교 신자인 시어머니는 작명소가 아닌 스님을 찾아갔고 사주와 이름의 조화를 말씀하시며 이 이름이 아이에게 너무 좋다고 전하셨다.
- 어머니, 춘은이는 안 될 것 같아요.
결혼하고 처음으로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어머니는 말없이 다시 돌아가셨고 다음날 전화가 왔다.
- 김두은은 어떠니?
썩 맘에 들지 않지만, 춘은을 듣고 난 후라 이제 그 어떤 이름도 다 귀여워 보였다.
춘은이 아닌 게 어디랴....
- 그럼 두은으로 할게요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핸드폰이 울렸다.
- 동서.. 두은이는 아닌 거 같아. 장손 이름이 도은인데 두은이라니. 두는 어감이 너무 쎄잖아.
맞다. 형님 아들 이름이 도은이었지? 형님이 싫다면 딱히 나도 누군가 반대하는 이름을 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썩 마음에 들지 않던 이름을 또 내가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름을 짓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세상 만물의 이름을 지은 사람은 누굴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큰 한숨이 나왔다.
잠시 후 친정엄마가 전복죽을 쑤어서 조리원에 왔고 나는 춘은과 두은을 이야기했다.
엄마는 마치 그 이름이 어떻게 우리 손주 이름이 될 수가 있냐며 남의 일처럼 박장대소하고 웃었다.
전화벨이 또 울렸다. 어머니였다.
스님이 춘은, 두은이 아니면 돌림을 쓰면 안 된다고 하더라.
이제 이름을 짓는 일은 나의 선택과 전혀 상관없는 일임을 직감했다.
- 네. 오빠에게도 전할게요.
같이 전복죽을 먹던 엄마는 이름을 전해 듣고 볼멘소리로
- 왜 하필 동권 이래니, 너 7살 때 너희 아빠 사업 사기 친 동업자 이름이 동건인데, 괜히 기분이 별로다.
또 전화벨이 울렸다. 시아버지셨다.
- 그냥 춘은으로 하는 게 어떠니, 집안 돌림을 없애는 게 좀 그렇다. 신라 김춘추 왕도 있고 김춘수 시인도 있고 춘이 생각보다 멋진 글자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조리원 침대에 걸터앉아 아기를 바라보니 탱글한 두 볼에 새근새근 자는 얼굴에 너무 미안했다.
다음날 어머니는 아버님을 설득했다며 돌림을 없애기로 했고 얼굴도 모르는 그 작명가 스님이 다시 주신
봉투를 받았오셨다.
지금 내 앞에 내려오는 이 줄이 썩은 동아줄이어도 나는 붙잡고 기어 올라갔을 거다.
-네, 이걸로 할게요.
그래서 저 녀석은 김민강이 되었다.
그런데 나에게 자기 이름 좀 그만 부르라고?
오늘 하루 종일 이름을 부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