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 #우리는 모두 적응중 입니다.
‘이번 소개팅도 망했다.’
남자의 왼쪽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직업이 의안사라니 정말 궁금했어요. 막 가짜 눈 만들고 그러는 거죠? 아 징그러워라. 안 무서워요? 매일 보니 익숙해졌으려나? 가격은 비싼가요? 무게는 어때요? 우리나라에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왜 내 주변에는 한 명도 없지?”
여자는 재촉하듯 쉴 새 없이 질문을 했다. 남자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예, 아 네, 그럭저럭요.” 짧은 대답을 하며 대충 시간을 때웠다. 늘 이런 식이었다. 남자를 궁금해 하기보다 그의 직업에 호기심이 가득한 여자들뿐이었다.
남자는 37세, 한정후, 직업은 의안사다. 여자와 헤어지고 시계를 보니, 환자의 예약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여유가 있었다. 3월 중순의 봄은 아직 바람이 차다. 인사동을 한 바퀴 걷다가 고릿한 머리 고기 냄새에 순댓국집으로 홀리듯 들어갔다. 뚝배기 위로 아우성치는 거품을 밀어내고 국물 한 숟가락을 뜨니 춥던 속내가 겨우 뜨끈해졌다. 정후의 사무실은 승강기가 없는 오래된 건물 3층이다. 하지만 같은 층에 종로에서 꽤 유명한 안과가 있어서 정후 역시 단골 환자들이 많다. 그는 14년째 안구를 만들고 그들에게 눈동자를 그려주는 일을 해왔다.
오늘 예약한 환자는 첫 방문이다. 실장이 책상 위에 올려둔 예약 차트로 눈을 옮겼다.
‘17세, 여, 김해니, 사고에 의한 좌안 실명’
정후는 분주히 김해니 환자를 맞을 준비를 했다. 초진 환자는 검사할 것이 많다.
환자가 병원에서 끼고 온 임플란트 모형을 토대로 본을 뜨고 안와에 맞도록 플라스틱 인공 안구를 세밀하게 깎는다. 의안의 모양은 정해진 규격이 다양하게 있지만 눈동자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천차만별의 홍채 패턴을 미리 준비할 수 없으니 한쪽 눈이 실명이라면 반대쪽 눈을 보고 백지에 눈동자를 그려야 한다. 흰자의 얼룩, 실핏줄 하나까지 손으로 직접 그린다. 그래서 작업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똑! 똑!
오후 3시가 되기도 전에 진료실 문이 열리고 작고 마른 소녀가 어머니와 함께 들어왔다.
“안녕, 어서 와,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왼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는 아이는 수줍게 한쪽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했다. 선천적으로 눈이 안 보이는 전맹보다 사고로 눈을 잃은 환자들은 정후에게 도착하기 전까지 이미 분노와 좌절을 수차례 반복한 사람들이다. 이곳에 도착하면 미소를 짓거나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네며 이미 자신의 불행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그는 자신의 일이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해 왔다. 가끔은 눈동자를 그리며 함께 마주 앉아 있다 보니, 환자들의 사연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환자의 흐르는 눈물이 멈출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일은 14년 차 베테랑도 아직 익숙하지가 않다.
해니는 두 달 전 생일에 실명을 했다. 등교를 했고 모두가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장난을 치며 친구들이 준비한 케이크에 얼굴을 세게 묻었다. 케이크를 고정하는 철 핀이 왼쪽 눈을 깊숙이 찌르고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정후가 만난 모든 환자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다 안타까웠지만 밝게 웃으며 자신의 사고를 덤덤히 말하는 해니에게 유독 마음이 갔다.
일주일 후
해니가 완성된 안구를 착용하러 다시 방문했다. 인공 안구를 삽입 후 거울을 본 해니는 양쪽 눈꺼풀을 연신 깜빡이며 만족한다는 듯 정후를 향해 빙긋 웃었다.
“어때 아저씨가 잘 만들었지? 네가 말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안을 꼈는지 잘 모를 거야. 불편하거나 아프진 않니? 처음에는 눈 안쪽이 뻐근할 거야. 마치 우리가 새 운동화를 사면 발이 꽉 끼고 답답한 것과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그렇지만 금방 적응된단다.”
“모두가 다 금방 적응하나요?”
“대부분은? 적응을 못해서 의안을 안 끼겠다는 사람은 거의 못 본 거 같구나.”
해니의 기습적인 질문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해니는 작은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코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헐. 제가 만난 어른 중엔 아저씨가 가장 솔직하네요.”
“자, 이제 의안을 세척하는 법을 알려줄게. 이물질이 끼면 눈 주위에 염증이 생기거나 의안이 금방 변색될 수 있어. 관리를 잘해야 오래 사용할 수 있겠지?”
해니를 데리고 세면대 앞으로 간 정후는 자신의 오른쪽 눈 밑을 지그시 누르며 안구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수도꼭지를 올리자 촤아-소리를 내며 물이 세게 흘러나왔다.
흐르는 물에 정후의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그 옆으로 또 하나의 작은 눈동자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