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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응보(因果應報)

by 이종열

창규 집 싸리대문에 금줄(禁줄)이 쳐지고 사흘 후 상복의 집 대문에도 그것이 쳐졌다.

창규 집 대문 금줄에는 고추가 꽂혔고 상복의 집 금줄에는 숯이 걸렸다.


자신들 부인에게서 산기(産氣)를 느낀 창규와 상복은 그제 마을회관 사랑채에서 무릎을 맞대고 앉아 반시진(半時辰) 새끼를 꼬았다.


창규는 아이의 부정(不淨)을 막으려면 새끼를 왼쪽으로 꼬아야 한다며 지금껏 오른쪽으로 꼬았던 새끼를 왼쪽으로만 꼬았지만 상복은 아이는 제 운명은

제가 타고 태어난다며 새끼를 손이 가는 대로 꼬았다.


둘이 새끼를 꼬고 그 다음날 창규부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사내아이였다.

사흘 후 상복의 부인도 아이를 낳았다.

계집아이였다.


둘이 산통(産痛)을 느끼고 반나절만에 아이를 낳았는데 순산하였다.


금줄은 일곱이레 동안 둘의 대문에 쳐져 있었다.


둘의 집 대문에 금줄이 쳐져 있었을 때 마을사람들은 금줄부근에 얼씬하지 않았다.

자칫 태어난 아이에게 부정이 생길까 두려워 얼씬하지 않은 것보다 금줄 쳐진 집 근처는 가지 않는 것이 마을의 법칙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무신에 까까머리 사내아이들은 자칫 삼신할머니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금줄 쳐진 대문을 멀리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창규와 상복은 대문의 금줄을 걷어내고 열흘 후 윗마을 서(徐) 진사를 찾아가 아이들 이름을 지었다.


서진사는 소시(少時)적 서당훈장에게 사서(四書)와 삼경 (三經)을 배웠는데 삼경 중에서도 주역(周易)을 깊이 있게 공부하였다.

마을사람들은 처음에는 서진사를 서생원(生員)이라 부르다가 덕망 높은 어른을 부르는 말이 쥐를 부르는 것 같다며 서진사라 바꾸어 불렀다.


그들은 마을에 아이가 태어나고 혼삿날을 잡을 때 진사를 찾아가 아이이름을 작명하고 혼사일자를 간택하였다.


또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에 우환이 들었을 때 진사를 찾아가 신수(身數)를 부탁하였고 큰 일을 결정할 때 성사여부를 그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서진사에게 점괘를 보고 신수를 볼 때 쌀 한말을 주었는데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은 보리쌀이나 콩을 주기도 하였다.


서진사는 창규 아들 이름을 승룡(昇龍)이라 지었다.

작명지(作名紙)에 -아이의 인생이 용이 오르 듯하다-라고 써주었다.


창규가 서진사에게 쌀 한 가마니를 보냈다.


서진사는 상복의 딸은 정숙(靜淑)이라 지으며 작명지에 -아이의 인생이 맑고 고요하다-라 썼다.


상복은 아이의 이름을 작명하고 달포가 지나 진사집에 보리쌀 한 말을 건넸다.


1971년

승룡과 정숙은 같은 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하는 날

승룡은 아비 창규와 함께 학교에 갔지만 정숙은 늙은 할머니 손에 이끌려 학교에 갔다.

상복은 '계집애가 글은 배워서 무엇에 써?' 하며 정숙이 학교에 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10리 길이 었다.


승룡과 정숙이 소풍 가는 날

승룡은 집에서 싸준 이까(오징어)볶음 반찬에 흰쌀밥 도시락을 들고 갔다.

흰쌀밥 위에는 찐 계란이 덮여 있었다.

도시락을 다 먹은 승룡은 가방에서 말표 사이다 한 병을 꺼내 혼자 마셨다.


정숙은 깜둥보리밥 도시락에 생된장과 오이, 고추를 반찬으로 썼다.

그나마도 정숙의 어머니가 아비 상복의 눈치를 보며 싸서 보냈다.

정숙에게 사이다는 언감생심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돌아온 집에서 승룡은 안방에 놓인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책과 마주하였다.

승룡이 모르는 것을 형들이 가르쳐주고 아버지 창규가 일러주었다.

승룡의 형들은 승룡이 국민학교 3학년 때 중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였다.


정숙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보자기를 풀고 호미와 낫을 들고 아버지, 어머니가 미리 가있는 논과 밭으로 가서 손을 거들어야 했다.


학교에서 종례시간이 길어져 조금 늦게 논밭에 온 날은 아버지 상복에게 심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 네까짓 것이 공부는 해서 무엇해?

계집아이가 글은 배워서 무엇에 써?-


정숙은 그런 자신의 일상들을 당연하다 여겼다.

옆집 친구 미자(美子)도 그렇게 살고 있었다.

공부는 사내들만 하는 것이고 여식들에게 공부는 사치라 여기며 살았다.


정숙의 어미만 그런 딸을 측은의 마음으로 보고 안타까워하였다.


세상사는 늘 뿌린 대로 거두고 움직인 만큼 수확하였다.

승룡과 정숙의 삶도 그랬다.


학교공부를 복습하고 예습한 승룡의 인생은 다져놓은 길처럼 탄탄대로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더니 명문대학에 입학하고 5년 후 공무원이 되었다.

의무교육이라는 국가시책 때문에 학교라는 곳은 다니지 않으면 자칫 화(禍)를 입을 수 있으니 할 수 없이 다녔던 정숙은 중학교까지만 하였다.


이나마도 아비 상복의 수없는 타박을 견디고야 졸업할 수 있었다.


정숙의 다른 친구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그녀는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민둥산에서 나무를 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교복을 입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싶어 하는 정숙의 마음을 어미는 눈치채고 마음 아파하였다.


정숙이 산에서나무를 지게에 매고 집으로 오던 날


아비 상복은 이제야 집구석이 제대로 돌아간다며 흡족해하였고 정숙의 어미는 딸이 가여워 평생처음 막걸리 두 대접을 마시고 정신줄을 놓았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는 말은 어느 극작가가 쓴 글이거나 어쩌다 공부하지 않고 성공한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쓰고 말한 어쩌면 궤변인지 모르겠다.


승룡과 정숙의 인생은 이후 급격히 갈리었다.

공부가 그들의 인생을 갈랐다.


승룡은 공직에서 승승장구하였다.

7급에서 5급이 되더니 얼마 있지 않아 정부 중앙직 고위공무원의 눈에 들어 공직의 중앙에 자리 잡았다.

그의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TV정부(政府)뉴스시간에 승룡이 가끔씩 나오더니 화면으로 나오는 횟수가 점차 늘어났다.

그의 일을 돕는 참모들의 수도 꽤 있었다.


승룡은 자신의 자리가 올라 갈수록 스스로 몸을 낮추었다.

그는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았고 후배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정숙은 고향을 떠나지 못하였다.

어릴 때부터 배우고 익힌 농사일을 고향에서 하며 살았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었다.


정숙은 고향에서 사람들에게 있는 대로 예쁨을 받으며 살았다.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꼭 윗집에서 혼자 사는 나이 십이 된 할머니를 찾아가 안녕을 확인하고 안부인사를 하였다.

다음 날은 조실부모하고 마을에서 살고 있는 어린 두 남매 집에 들러 둘의 형편을 살폈다.

아이들 몰래 쌀두지에 쌀을 채워 놓기도 하였다.


명절 설이나 추석이 되었을 때 승룡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고향에 왔다.

그가 고향에 올 때 검은색 관용차를 타고 왔는데 운전은 전속기사가 하였고 자동차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는 일은 전속비서가 하였다.


승룡이 승용차에서 내리고 트렁크가 열릴 때 마을어른들이 미리 나와 그를 기다리고 환대하였다.


비서가 내린 짐은 마을어른들에게 나누어 줄 선물이었는데 주로 어른들이 겨울에 쓸 양말과 장갑이었다.

지난해에는 마을회관에 라디오와 석유난로를 사주기도 하였다.


승룡은 매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사비(私費)로 마을어른들을 챙겼다.

승룡의 아비,애미는 괜스레 마을회관에 갈 일을 만들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라디오와 난로를 만졌다.


사람들은 승룡과 정숙을 말할 때 약간의 차별을 두었다.

승룡을 말할 때는 바쁘고 높이 있는 사람이 고향을 챙긴다며 기특하고 갸륵하다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정숙을 말할 때는 매일 뜨는 해를 말하여 듯,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우물 안 샘물 말하듯하였다.


당연하다 여기고 늘 그렇다 여겼다.

어떤 이는 정숙을 마음에 조차 두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에 대한 정숙의 배려를 마을사람들은 당연지사라 여겼다.


사람들의 생각과 평(評)을 승룡은 뿌듯하게 여겼고 정숙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승룡의 부모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정숙의 아비와 애미는 생각이 갈렸다.


정숙의 아비 상복은 '여자들 삶은 그저 배곯지 않고 내리는 비를 홀딱 맞지 않을 정도의 집만 있으면 족하다'생각하였고 어미는 자신에게서 딸에게로 대물림 된 여자의 일생을 마음 아파하였다.


어쩌면 운명은 잔인하였다.

어떤 가당치 않은 이유로 급격히 나빠지고 좋아지는 사람 팔자는 소설이나 드라마 작가의 소재거리에서나 나오는 것들이었다.


승룡과 정숙의 삶은 지금껏 그랬던 것과 같이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내일이 되었다.

천일(千日)이 여일(如日)하였다.


승룡은 부잣집 딸과 혼인하여 그도 부자가 되었다.

그의 처부모가 수시로 부유하지 못한 그의 집으로 돈과 땅을 보냈다.

부(富)와 명예가 같이 다녔다.


얼마지 않아 아들 둘을 두었는데 아이 둘이 알토란 같았다.

금상첨화였다.


정숙은 동네 범부(凡夫)에게 시집갔다.

그녀의 남편도 정숙과 같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지었지만 술과 노름을 좋아하였다.

그의 조부가 맨 처음 마을로 들어와 화전(火田)을 일구었으나 워낙 없는 집이라 가난은 늘 그림자처럼 그들을 따라다녔다.

정숙집 재산과 시댁의 재산을 합쳐도 승룡집 재산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랐다.


혼인을 하고 4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어 시부모 애간장을 어지간히도 태우더니 늦게 아들을 얻었는데 아이는 놀기를 좋아하고 공부와는 담을 쌓고 어린 날들을 보냈다.

설상가상이었다.


정숙의 어미는 그의 나이 환갑을 넘기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정안수에 기도하였다.

부처님이 계시는 북쪽으로 합장으로 기도하였다.

"천지신명이시여 보살피소서.

부처님이시여 가피를 내리소서.

어리고 가엾은 내 딸 정숙에게~

내 손자 병규에게~

그리 해주소서"


그러나 그녀의 기도는 늘 허공에서 맴돌았고 염불은 공염불이 되었다.

기도는 지성(至誠)이었지만 하늘은 감천(感天)하지 않았다.


딸 정숙의 삶은 계속 고달팠고 외손자 병규는 늘 겉돌았다.

'신은 없다.

천지신명은 애시탕초에 없었고 부처님은 속세 어디에도 오시지 않았다.

신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숙 어미는 더 이상 아침 기도를 하지 않았다.

정안수를 떠놓았던 그릇은 개 밥그릇으로 썼고 북쪽으로 보고는 오줌도 누지 않았다.


'신은 없다.'


초여름 어느 날

첫 매미가 박모(薄暮)가 내려앉은 마당 앞 감나무에서 울어대었다.

매미는 사람들의 운명을 차별하지 않고 아무 집 마당에서도 울었다.


"주인장 계시면 늙은 땡중에게 시주 좀 하시오.

시주도 선업이고 선업을 행하면 적선(積善)이 되니 시주하시어 적선하시오."


마당에서 나는 사람의 목소리가 매미소리를 지웠다.


정숙의 어미가 방에 앉은 채로 문을 열고 소리가 나는 마당을 보았다.


방갓을 깊이 쓴 탁발승(托鉢僧)이 치던 목탁을 멈추고 합장으로 정숙의 어미와 마주 하였다.


"스님이 다 늦은 이 시간에 어찌 저희 집에ㆍㆍ"

전에 같았으면 버선발로 뛰어나와 스님을 맞이하였을 정숙어미가 방에 앉은 채로 말소리만 내보냈다.

" 예.

지나가는 땡중인데 조금의 시주라도 ㆍㆍ"


노승의 얼굴은 눌러쓴 삿갓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낮고 카랑하게 들렸다.


"우리 집도 작년에 흉작이 들어 스님께 많은 시주는 할 수 없으니 서운하게 생각은 마십시오. 스님"


정숙어미가 억지로 몽을 일으켜 뒤꼍 뒤주에서 보리쌀을 바가지에 담아 노승의 탁발봇짐에 넣어 주었다.


"시주음식의 많고 적음은 중요치 않습니다.

마음을 주시면 그것으로 된 것이지요.

집 안에 늘 부처님의 가피가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노승이 합장하고 마당을 나서려하자 정숙어미 마음 깊은 곳에서 울분이 쏱구쳤다.

열불이 터졌다.


"스님!

대체 부처님이 계시기는 한 건가요?

제가 스님께 시주를 한다고 부처님이 알기는 하신가요?"

노승의 뒤에다 정숙어미가 열불을 토해내고 울분을 쏟아 부었다.

노승이 조용히 돌아서 정숙어미와 마주하였다.

깊게 눌러쓴 삿갓이 여전히 노승을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부처는 분명히 계십니다.

보살님 마음속에, 보살님 삶 속에 부처님이 계시지요.

산사(山寺)에 가부좌(跏坐)로 앉아있는 부처는 그저 형상이고 보삼 님 속에 진정한 부처가 있습니다.

보살님이 부처님이십니다."


눌러쓴 삿갓을 헤집고 나온 노승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진중하였다.


"스님

저는 그런 어려운 말은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조금 전 스님께서 저에게 시주를 말씀하셨을 때 '시주가 선업이고 선업을 행하면 적선이 된다'하셨는데 저와 제 딸아이는 지금껏 늘 남을 돕고 착하고 반듯하게 살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선업이고 그것이 적선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스님?"

정숙 어미의 말소리는 갈라지고 탁(濁)하였다.


"그리 사셨다면 분명 보살님은 적선의 삶을 사셨어요.

분명 맞습니다."

노승의 말소리는 작고 정(淨)하였다.


"그런데요.

저는 그렇다 치더라도 제 딸아이 정숙의 삶이 왜 저리도 어렵고 왜 저리도 고달프단 말입니까?

지금껏 지 애비한테 따뜻한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학교도 중학교까지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밭매고 논갈고 소먹이며 살고 있습니다."

어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노승이 침묵으로 어미를 보았다.


"부모복 없는 년이 서방복, 자식복도 없습디다.

선업의 결과가 저리도 고되고 처참하단 말입니까?

부처님은 어디 계신가요?

대체 어디에 계시단 말입니까?"


정숙어미는 마치 자신의 앞에 서있는 노승이 딸의 삶을 힘들게 한 것인 양 노승에게 속엣말을 쏟아 내었다.


"보살님

인과응보라는 말 뜻을 아시는지요?"

노승이 쓰고 있던 삿갓을 뒤로 젖히고 정숙어미를 바라보았다.


정숙어미 앞에 서있는 노승은 사실 약 3년 전까지 그녀가 다녔던 절의 주지스님이었다.


신은 없다고 생각한 정숙어미가 다녔던 절에 발길을 끊은 지가 3년이 되었고 이후 그녀와 주지승은 볼 일이 없었다.

눈에 보이는 노승의 모습은 전에 보았을 때보다 얼굴과 몸에 세월의 흔적들이 더 선명히 드러나 보였다.


"인과응보라니요?"

정숙어미는 부처님의 가피가 왜 지금껏 착하게 살아온 자신의 딸에게는 미치지 않는지를 묻는 자신에게 인과응보라는 생뚱맞은 대답을 한 스님에게 또 다른 분심(憤心)이 일었다.


"소승이 보기에 보살님의 따님 정숙은 전생이 산골 작은 마을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주모(酒母)였지요.

힘들게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던 촌부들에게 술을 팔고 웃음을 팔며 살았어요.


그러다가 마을사람들에게 웃음의 대가로 돈을 빌리고 빌린 돈 대부분은 갚지 않았지요.

그들에게 그 돈은 생명줄 같은 소중한 것들이었는데요.


또 아이가 셋 딸린 범부(凡夫)를 꼬덕여 그의 가정을 해치기도 하였답니다.

종국은 마을사람들이 관아에 발고를 하였고 그때 맞은 곤장이 화근이 되었고 추운 겨울날 갇힌 옥(獄)에서 병을 얻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무아미타불"

노승이 치는 목탁소리가 마당을 한 바퀴 돌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정숙은 지금 자신의 업보를 갚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업을 가지고 있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업을 갚아야 합니다.


그 업은 부처님도 어떻게 해줄수가 없습니다.


업을 다 갚는 순간 해탈(解脫)의 경지가 오고 그때 비로소 열반(涅槃)에 드는 것이지요.

그때야 진정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따님 정숙을 그리 보십시오."


노승이 다시 삿갓을 눌러썼다.


정숙의 어머니는 그 순간 태어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하였던 후련함을 느꼈다.

백 년간 자신의 발등을 누르고 있던 큰 바위가 치워진 듯 가벼움을 느꼈고 십 년간 묵었던 체증이 내려간 듯 시원함을 느꼈다.


정숙어미가 합장으로 노승에게 절하였다.


"그리고 보살님!

지금의 생(生)이 다음 생에서는 또 전생이 됩니다.

다음 생에서 태어날 때는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현재의 업을 그대로 가지고, 현재의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ㆍㆍ

그러니 지금을 잘 사셔야 합니다.


따님의 다음 생은 분명 맑고 고요할 것입니다.

부디 성불(成佛)하십시오"


노승이 되돌아서 마당을 나서고도 한참 동안 정숙 어미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노승이 떠난 자리 하늘 위로 한 무리의 반딧불들이 여름밤을 밝혔다.


집 뒤 얕은 산 언저리에서 소쩍새가 울었다.

"소쩍소쩍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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