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어느 날, 몇 달을 일에만 몰두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표지가 예뻐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윤영미 아나운서의 ‘여, 행하라’를 읽으면서였다.
국내 여행을 추천하는 내용의 여행에세이였는데 광주 편에서 다음 글을 읽은 후, 홀린 듯 광주의 호랑가시나무언덕 게스트하우스를 검색하고 비어 있는 1인실을 예약해 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더욱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력감에 놓여 있을 때, 잠시 휴대폰을 꺼두고 세상과 단절하여 머릿속을 하얗게 표백하고 싶을 때, 인간 목소리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을 때 찾게 되는 이곳.”
6월 7일, 나는 부산 서부버스터미널에서 광주행 고속버스를 탔다. 광주로 가기 며칠 전, 어떤 일이 있었다. 과정과 결론에 도달하는 일련의 내 판단은 옳았고 내 행동은 심지어 차분하고 용감했고, 멋있었다. 하지만 다시 떠올리기 싫은 그 장면이 며칠간 수시로 나를 덮쳐 힘들게 하는 걸로 보아 그 사건은 오래, 그리고 괴롭게 기억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 머릿속을 정말 하얗게 표백해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을 안고 광주에 도착했다.
초여름 광주의 낮은 더웠지만, 습한 기운은 많지 않아 그늘을 찾아 걸으면 견디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1947년부터 영업했다는 ‘광주옥’에서 담백한 평양냉면을 한 그릇 먹고 여행을 시작했다. 백석의 시 ‘국수’의 구절이 식당 벽에 적혀 있었는데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평양냉면은 광주의 첫인상처럼 담백했다. 지인이 추천해 준 국립아시아문화전당까지는 지하철을 이용했다. 건물은 규모가 굉장히 컸고 볼만한 전시가 많았다. 사람들은 멋진 건물 이곳저곳에서 휴식도 하고 책도 읽고 전시를 관람하며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애호가 편지’와 ‘이이남의 산수극장’을 훑어보고 숙소 쪽으로 걸어서 이동하기로 했다. 가는 길에 펭귄마을 근처에 있는 작은 책방 ‘러브앤프리’에서 박준 작가님의 신간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를 구입했다.
호랑가시나무언덕 게스트하우스까지 가는 길이 참 정겨웠다. 인쇄소 골목을 지나 작은 천변을 건너 예전 선교사들이 살던 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여러 골목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이제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은 아닌 것 같았지만 카페나 음식점, 갤러리들이 곳곳에 보였다. 언덕을 올라 숙소에 도착했고, 미리 전달받은 비번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되어 낡은 서양식 건물이었고 건물 내부의 인테리어나 구조는 어린 시절 살았던 주택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2층의 ‘서서평방’을 예약했다. 2층엔 방이 2개였는데 내가 묵은 방이 아닌 나머지 방에서 전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숙박했다는 내용의 블로그를 읽은 적이 있다. 욕실은 공용이고, 거실과 베란다가 있는 전형적인 가정집 구조로 실제로 선교사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베란다 쪽으로 난 큰 통창으로 바깥의 수풀이 한가득 보여 싱그러웠다. 아래층 공용 주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숙소의 위치나 분위기는 완벽했는데 하나 아쉬운 점은 숙소의 청결도였다. 어린 시절 엄마가 며칠 청소를 안 한 집에 간 기분이랄까. ‘다 좋을 순 없구나.’ 싶었다. 방에서 조금 쉬다가 숙소 주변을 돌아보았다. 호랑가시나무언덕 주변의 산책길을 걷고, 선교사들의 집도 구경했다.
‘한희원 미술관’은 좁은 골목에 위치해 있었는데 작은 공간을 짜임새 있고 세련되게 꾸며 놓아 눈길이 갔던 곳이다. 작품들도 멋있어서 꽤 오래 머물다 왔다. 한희원 작가님은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1년간 생활한 이후 내면의 철학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전념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방인의 소묘’라는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장소도 가보고, 미술 작품도 감상하면 머릿속이 비워질 것 같았는데 박준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보낸 밤은, 오히려 더 가득 채워지는 듯했다. 절절한 시어들 위로 둥둥 떠다니는 꿈을 꾼 것 같았다.
“서쪽 마을에서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습니다
버린 기억을
테두리처럼 두른 것이
제가 이곳에서
한 일의 전부입니다 “
- 박준, <은거> 중
다음날 아침 방문한 ‘이강하 미술관’에서 ‘이매리’ 작가님의 작품을 보며 광주에 정착한 7천 명의 고려인을 그려낸 깊은 의미를 알게 되었다. 작가님의 인터뷰 말씀처럼 인류의 아픈 역사는 전쟁과 이주가 주축이 되었다는 외면하고 싶은 사실들을 광주에서 직면하게 되니 더욱 겸허해지는 기분이었다. 보스니아와 사라예보에서도 전시를 하시며 참혹한 전쟁의 후유증을 예술로 표현하여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감동적이었다. 이강하 미술관의 큐레이터님은 18일에 이매리 작가님이 방문하신다며 나에게 꼭 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너무 감사한 말씀이었다.
광주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말하라면 ‘이이남 스튜디오’이다. 내가 묵은 숙소 바로 옆에 있었는데, 부산으로 돌아가기 전 이곳에 방문했다. 개인 카페이자 갤러리인데 규모가 컸고 큐레이션이 근사했다. 나는 커피를 한잔 마시고 갤러리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가장 멋진 곳은 1층 전시관이었다. 나는 미디어아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예술이라기엔 기계의 힘을 빌려 작업한 영상이 아닌가. 하는 아날로그적 생각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도 조금씩 무뎌질 것이다. 기계와 프로그램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이고 인간은 도구를 사용해 창작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새는 사람들’을 미디어아트로 만든 작품에 끌렸는데 이 작품을 몇 년 전 부산 벡스코 아트페어에서 본 기억을 떠올렸다. 2차원의 그림에 영상을 부여해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지고 무표정한 사람들의 표정이 스며들다 사라지는 영상 기법은 매력적이었다. 마치 큰 티비 화면 속에 그림이 꽉 채워서 들어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또 한 공간은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는 ‘모네’의 ‘수련’이 전시된 곳을 연상하게 하는 곳으로 벽 3면에 모두 커다란 미디어아트를 설치해 두고, 긴 의자를 두고 앉아서 관람할 수 있게 하였다. 잔잔한 음악이 들리며 온통 풀과 꽃들이 살랑거리는 풍경이 가득한 화면을 자세히 보면 알파벳들이 풀 위에서 떠오른다. 아마 식물들이 대화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겠지. 마음에 안정을 주는 작품이었다.
예술로 가득한 광주였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조용했고, 왠지 예쁘게 보였다. 음식도 맛있었고, 커피도 근사했다. 대도시와 소도시 사이에 있는 중간 도시 같은 느낌으로 크게 번화하지는 않지만 부족한 것도 없는 곳이었다. 너무 아픈 상처를 품은 곳에서 살고 있기에 사람들은 차마 크게 웃지 못할 것 같이 느껴진 것은 내 기분 탓일 것이다.
하얗게 표백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한가득 새로운 감성을 품고 돌아왔다. 광주도 나도 이제 회복기에 접어들었다. 광주가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