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을 함께 살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것이 있다.
남편은 내가 끈기가 없는 것을 알기에 '저러다가 말 것'이라고 여기고 눈앞에 있는 상황만 피하려 한다.
나는 '말해봤자 그때뿐'이라고 확신하며 포기하기 일쑤다.
남편이 제멋대로 사는 것에 내가 최적화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상담사는 부부 문제의 이유는 내가 끈기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단호하지 못해서라고 딱 잘라 말했다.
자신 있게 진단한 상담사의 말이 그때는 좀 생소했다.
평소 나는 딱 부러지는 성격에, 할 말 다하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그런 내가 단호함이 없다고?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상담이 거듭될수록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상담사가 지적했던 문제에 대해 조금씩 인식했다.
일단 나는 말이 많았다.
한 가지 잘못을 지적하다 보면 다른 곳으로 감정이 이동해서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니본질이 흐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외박 때문에 다투다가 생활비를 안주는 것으로 옮겨가기도 하고, 변기 사용을 지적하다가 샤워 문제, 갈아입는 옷으로까지 번지기도 했다.
그러니 매번 내 말은 그냥 '잔소리'일 뿐 남편에게 어떤 타격감도 주지 못했다.
본질을 제대로 전하려면 간결하고 단호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두 번째 문제는 약속에 대한 입장차이다.
내가 남편에게 절대 용납이 안 되는 문제는 배약이다.
약속을 너무 쉽게 어기고, 그럴 때마다 나는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 화를 참지 못한다.
그러나 남편은 약속한 것을 잊을 때도 있을 정도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약속을 어기는 것이 꼭 상대방을 무시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상담사가 대놓고 말하진 않았으나 나의 자격지심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실제로 아들도 나에게 비슷한 말을 했었다.
약속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그걸 꼭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건 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내가 생각하는 게 비뚤어졌을 수도 있겠구나'
이렇게 하나씩 나의 문제를 보고 고쳐가다 보면 우리 부부도 괜찮아질 수 있을까.
나만 달라지면 괜찮아질 거라고, 내가 모든 문제의 원인을 제공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을 종종 했다.
남편은 어차피 달라지지 않을 사람이니 나에게서 문제를 찾는 것이 미움이나 분노를 재울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석 달 후에 집을 나가겠다고 남편이 큰소리치긴 했으나 나는 석 달 안에 우리 관계가 달라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 싸움이 여느 때처럼 칼로 물을 베는 부싸움이 될 거라 믿고 싶었다.
젊을 때는 남편을 완전히 내보내서 고난의 행군으로 인생 쓴맛을 보여주겠다는 생각도 했다.
물론 실행으로 옮긴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백기투항을 한건 항상 나였다.
남편은 어떤 경우에도 그 잘난 자존심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무소식이 걱정되어 문자 하나라도 보내면 그걸 핑계 삼아 득달같이 집에 들어와서
"네가 연락해서 들어온 거야!"
하며 의기양양했다.
문자의 뜻을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하는 남자였다.
상담 덕분에 그동안 많은 내쫓김에도 남편이 끄떡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또 그런 식으로 끝날 거면 아예 시도하지 마세요!"
나보다 한참 젊어 보이는 상담사는 부드러운 눈웃음과 어울리지 않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저도 그러고 싶어서 이곳에 오게 됐어요."
갈팡질팡 하는 나를 잘 코치해 줄 것 같아 이제는 나도 달라질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이미 나는 전의를 상실하여 전장에 나갈 힘도 없지만, 상담사의 말대로 행동하면 뭐가 되든 되겠지.
더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지금이 아니면 이모양 이꼴로 평생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단호해지기로 결심했다.
잘 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지만 안되면 이혼도 불사하겠다고 다짐한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나에게 변화가 절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