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을 보면 늘 카리브해의 해적들이 어딘가에 보물을 숨겨놓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늘 나오는 것은 그 보물을 두고 싸우는 적 들. 함부로 훔친 물건이다 보니 주인이 없고, 그렇다 보니 먼저 가져가는 것이 룰인 그들의 세계를 대변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숨겨놓은 보물이 없을까? 당연히 있다. 다만 섬보다는 뱃속에 있다. 먹는 배가 아닌 타는 배, 즉 난파선에 가득한 것이다. 최근에 발견된 것으로는 2007년 발견된 충남 대섬과 마도 앞바다. 5척의 난파선이 발견되었고, 여기서 금화는 아니지만 그것에 버금가는 2만 8천여 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한국 최초의 해양 유물은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중국 원나라의 무역선 '신안선'이었다. 14세기 중국의 배가 일본으로 가는 중 태풍을 만나 침몰하게 된 것. 한 어부가 고기잡이 중에 우연히 도자기 6점이 그물에 걸려 나와 알려지게 되었고, 1975년 10월부터 1984년 9월까지 9년간에 걸쳐 모두 11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을 만큼 대단한 발굴이었다.
신안선. 출처 문화재청
9년간의 조사를 통해 침몰된 배의 조각 445편을 비롯하여 도자기 20,661점, 금속제품 729점, 돌로 만든 제품 43점, 자줏빛자작향나무 1,017개, 동전 28톤 18Kg, 기타 574점 등 총 23,024점이 출토되었다. 이후 수중 유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국내에도 수중고고학의 기반이 마련된다.
모두 서해에서 발견되는 보물선
지금까지 국내에서 수중 발굴조사된 고선박은 모두 15척이다. 그리고 발굴된 유물은 10만 점이 넘는다.
이중에서는 고려시대 배가 11척, 통일신라와 조선시대 선박이 각 1척이다. 나머지 2척은 중국 배인 ‘신안선’과 ‘진도선’이다.
이렇게 수중발굴로 확인되는 고선박은 흔히 ‘보물선’ ‘바닷속 타임캡슐’이라 불리는데, 태풍과 폭풍우 때문에 파도와 바람과의 사투를 벌이다 급작스레 침몰한 난파선. 안타깝기는 하지만 당시 배에 실린 유물들은 마치 타임캡슐처럼 당대의 역사와 생활문화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덕분에 고고학 연구에 소중한 자료들로 활용되고 있는 상황. 흥미로운 것은 15척의 배들이 거의 대부분 서해에서 발굴이 되었는데 왜 그랬을까?
왜 서해에서만 보물선이 발견되나?
바로 고려의 개경으로 이어지는 수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웠기 때문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 역시 서해의 강화도, 임진강을 건너오면 바로 한강으로 이어지는 곳. 특히 고려 건국부터 조선시대까지 충청의 서해안은 남도의 특산물이 수도로 올라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곡창지대인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거둬들인 조세는 물론이고, 관리들의 수조지에서 거둔 물자들도 충청 해안을 거치지 않고는 수도로 올라갈 방법이 사실상 전무했던 것이다.
그런데 험로가 있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을 가기 위해서 꼭 거쳐야 했던 안면도~태안반도에 이르는 안흥량이라는 구간이다. 물살이 빠르고, 바다 밑에 날카로운 석맥(石脈)들이 누운 듯 숨어 있어서 조금만 방심해도 난파를 면치 못하는 최악의 구간인 것이다.
피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또 이 안흥량 구간을 경유해야 잘 도착할 수 있었다. 역대 군주들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조운선이 올라올 때마다 안흥량에서 난파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매번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주꾸미가 발견한 난파선
흥미롭게도 난파선을 발견한 존재는 어쩌면 사람이 아니기도 했다. 2007년 태안군 대섬 앞바다에서 발건한 태안선의 스토리다. 한 어민이 주꾸미를 건져 올렸는데, 주꾸미가 수백 년 전의 청자를 안고 올라온 것이다. 주꾸미 어업 방식으로 그물에 소라 껍데기를 달아 놓으면 주꾸미가 그 안에 들어가 알을 낳은 다음, 입구를 자갈로 막아 놓는데 그물을 건져보니 청자 접시로 입구를 막고 있는 주꾸미가 있었던 것이다.
도자기를 가지고 올라온 쭈꾸미. 출처 KBS뉴스
그래서 주꾸미를 건진 구간을 조사한 결과 2만 5000여 점의 청자를 실은 12세기 청자운반선이 발견된다. 주꾸미가 아니었다면 2만 5천여 점의 고려청자가 아직도 바닷속 어딘가에 깊이 묻혀 있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 유물인 것은 어떻게 아나?
배를 인양했을 초기에는 잘 몰랐다. 배에 있는 수많은 짐들을 보며 미궁에 빠져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목간이라는 나무조각이 발견되면서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종이가 활용화되기 전에는 나무는 오랜 기록 수단으로 쓰였는데, 기록 수단으로 쓰인 나무를 목간이라고 불렸다.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 보관 중인 목간.
특히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목간(木簡)은 고려청자 운반의 비밀을 풀어줄 중요한 단서로 소나무 껍질에 묵서(墨書)를 한 것인데, 지금에 비유하면 바코드처럼 생산지와 고려 운반선과 청자의 출항지, 배달처 등 거래관계가 적혀있었던 일종의 화물운송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청자 운반선에는 무려 10개의 목간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발굴되었고 난파선의 출발지와 목적지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모습을 드러나게 된다.
목간 기록된 내용을 해석해 보니 탐진(耽津, 지금의 강진)에서 개경의 최 대감(崔大卿) 집으로 사기 1과(沙器一)를 보낸다는 내용과 생산지, 출항지, 거래관계, 운송책임자, 선박적재 단위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는다. 이런 내용들을 통해서 도자기의 생산 및 거래경로는 물론 강진에 가마터가 있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가마운영체제 연구를 밝혀낼 수 있는 등 중요한 자료까지 되었다. 지금에 비유하면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의 주소뿐만 아니라 어떤 물품을 보내는지가 꼼꼼히 기록되었던 것. 이러한 목간 덕분에 해양유물의 실마리가 하나씩 풀린 것이다.
가장 많이 발견된 유물은?
태안 마도 해역에 침몰한 고려시대 선박(‘마도 2호선’)의 수중 발굴조사 중 배에 실려있던 도자기들을 살펴보는 자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고려청자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 청자들은 생산지에서 소비지로 운반되던 중 배와 함께 가라앉은 것으로, 당시의 운반체계를 보여주기도 하는 요즘 말로 신상 제품이다.
고려시대의 트렌드를 보여주었던 신제품 청자들이 배송되는 배였기 때문에 포장까지 잘해놨던 터라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배에 실을 당시 포장까지 잘해놔서 발굴당시 포장까지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유물도 꽤 많았다.
또 고려청자가 상류층에만 한정된 소비층이 일반대중으로 확산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궁궐이나 사찰용으로 사용되던 고급청자도 많았지만, 일상생활용기로서 대접, 접시 등 다량생산된 보급용 청자까지 다양한 청자들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청자들을 통해 13세기 이전 우리나라의 독창적 도자제작기술이었던 상감기법이 이미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 것이다.
사진은 보물로 지정된 주요 고려청자 전시품들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가장 가치 있었던 보물이라고 한다면?
청자철화퇴화문두꺼비형 벼루를 추천하고 싶다. 발굴되자마자 보물로 지정이 되었을 만큼 보존상태와 예술성을 잘 갖춘 두꺼비 모양의 벼루다. 두꺼비가 고개를 위로 들고 손과 발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으로 흰색 흙(백토)과 철 성분이 들어있는 물감인 철화를 사용하여 두꺼비의 피부와 눈동자 등을 표현했다.
두꺼비의 눈과 입, 다리의 주름 등은 음각선을 새겨 표현하였고, 고려청자 벼루 중 두꺼비 모양으로 만든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매우 귀한 유몰로 평가받고 있다.
어디 가서 볼 수 있나?
2019년 개관한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 가시면 우리나라 서해 중부해역(경기, 충청지역)의 해양문화유산들을 관람할 수 있다. 박물관과 함께 수장고가 함께 있어서 수중 발굴·전시·연구·보존 기능을 함께 수행하고 있는 종합연구기관이다. 서해 바다에서 고이 잠들었던 9척의 난파선에서 발굴한 약 3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가장 볼만했던 전시물은 2009년 태안 마도 해역에서 출수된 고려시대 선박 마도 1호선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 전시하고 있다.
보물발견하면 보상금은 얼마 받나?
현재 누군가가 보물을 발견하고 국가에 신고했다면 얼마나 보상금으로 받을 수 있을까? 주꾸미가 발견한 청자의 경우 불과 1점이었다. 이 경우 유물 평가액은 12만 원. 일반적으로 50%의 가치를 보상금으로 받는다. 즉 6만 원밖에 안 되는 셈. 하지만 이 경우 이 청자대첩을 계기로 태안선을 찾았다. 이러한 경우에는 포상금이 지급된다. 포상 규정에 따르면 1등급의 경우 [2000만 원+(문화재의 평가액-1억 원) ×(5/100)]이 된다.
이 계산이 적용, 보상금 6만 원과 포상금 2000만 원을 받았다. 즉 2006만 원을 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주꾸미는 어떻게 되었을까? 주꾸미는 아주 큰 역할을 했지만 보상은 돌아가지는 않았다. 본래의 목적대로 공판장으로 팔려가며 어업 수익까지 주고 떠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