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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사 Aug 30. 2024

받아들임과 초연함 사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는 힘


초연超然.

도박중독 가족들에게 자주 들리는 말입니다.


"초연함이란 건강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 각자는 자유스러운 개인으로서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하루하루에 살자> 2월 22일


반복은 강조이고 강조는 그만큼 중요한 걸 텐데 저는 그 말이 거슬렸습니다.






폭풍 전야, 아니면 폭풍우가 닥치는 상황에서 초연超然하라니. 사치 같았죠. 거대한 파도가 밀려와 난파당하기 직전인데 초연超然이라니. 그 말이 거친 파도가 물러난 뒤 잔잔한 상태를 말하는 것 같았지만. 반복 강조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싶었습니다. 와닿지도 않고 위안도 되지 않았어요. 


초연超然은 그렇게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하고 허공 맴돌다 사라 줄로만 알았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남보다 더 많은 문제들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문제들에 어떤 해결책을 생각해 볼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빠져있다. 이러한 어지러운 상태에서 우리의 생각을 높이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만, 만약 신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운다면 할 수 있다. 신의 도움은 항상 우리에게 있으며, 필요할 때마다 항상 준비되어 있다. 신의 도움을 받고 있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 가족 모임에서는 문제만 깊이 생각하는 것 대신 문제를 올바른 견해로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루하루에 살자> 5월 26일        


초연超然. 무엇을 뛰어넘는다는 의미가 담겨있으니 갬아넌에서 언급하는 '위대한 힘'과 연관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나약함을 뛰어넘는 '위대한 힘'을 '하느님'으로 바꿔 읽을 수 있었던 건 제가 천주교인이라 랬지만. 그래봤자 소용없는 구호뿐이라고 여겼죠. 속일 수 없는 속마음은 하느님이 우리 母子, 우리 가정을 내팽개쳤다고 원망하고. 대들고. 악다구니를 쓰고. 하느님을 저주하고 있었으니.


지나고 보니 처음에만 그런 게 아니었고 한참 동안 그랬습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입장이 낮아지는 상황에 복종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처해있는 상황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인 후에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하루하루에 살자> 3월 25일          


날마다 <하루하루에 살자> 책자쳐 거기서 난파당하지 않을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허공을 맴돌다 공중분해된 줄 알았던 초연超然. '사라졌다가도 다시 곁에 와서 맴도는 느낌. 이건 또 뭐지.'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 밀려오는 거센 파도보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파도가 더 감당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아들의 도박중독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부정하고 도박이 불치병이라 분노하고 도저히 인정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항복하고 받아들습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서 받아들였더니 몹시 우울했습니다.

버티 버티다 버틸 수 없게 되자 몸이 축 늘어졌죠. 긴장이  치받던 화도 삭고 목이 메던 증상도 사라습니다.





파도의 방향과 크기를 바꿀 수 없고 불가능니다. 그러나 파도가 바다의 일부이고 바다는 본래 그렇다는 걸 받아들일 수는 있었죠. 계속 폭풍우만 밀려오는 게 아니고 파도가 괴물처럼 밀려오다가도 잠잠해 했으니까. 이런 바다가 앞의 현실르지 않았습니다.



'그냥 살지, 뭐.'  

'죽기밖에 더하겠어.'

최악의 상황을 그려보니 오히려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제 내 안에 힘이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인정하고 받아들이니 의외로 평온해졌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도박행위와 가정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무력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회복을 위한 12단계의 첫 번째 계명을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힘었는지. 무릎을 꿇은 힘으로 다시 일어서서 걸어가야겠죠.




받아들임과 초연 사이에는 틈이 없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자 초연이 곧장 땅으로 내려 이렇게 말줍니다.


도박을 하든 말든, 빚을 갚든 말든, 거짓말을 하든 말든  관하지 라고.


'어쩔 수 없는 것' '통제불가한 것' 내버려 두라고.


희로애락에 휩싸이지 않고  일정하게 거리를 두라고.


참아낼 것 없바라보는 '관찰자'가 되라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고 지혜로운 결정을 해 주는 초연함을 배우고 익히며 살아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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