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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r 20. 2023

비누 한 장을 1년째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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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만 해도 욕실에 있는 세제 종류가 이렇게 다양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샴푸와 린스, 그리고 비누 정도가 고작이었다. 샴푸와 린스는 머리 감을 때나 쓰는 것이고 그 외의 모든 세정은 다 비누로 했다. 세수도, 목욕도, 화장을 지우는 것까지도. 그래서 그때는 비누가 꽤 절실한 생활필수품이었고, 동글동글하고 커다란 생김새의 '잘 닳지 않는 비누'가 나왔을 때 엄마가 무척 좋아하셨던 것도 어렴풋하게 생각난다.


그러나 그랬던 비누는 요즘은 다분히 여기저기 하는 일을 많이 뺏긴 뒷방 늙은이 신세라는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다. 우리 집 욕실만 해도 그렇다. 화장을 지울 땐 폼 클렌징을 쓴다. 샤워를 할 때는 바디워시를 쓴다. 심지어 발을 씻을 때도 풋샴푸를 쓴다. 이러나 비누가 할 일이 딱히 없어진 느낌이다. 그래도 욕실에 비누가 한 장은 있어야지, 하고 구색 삼아 갖다 놓은 그런 느낌이랄까. 외출했다 돌아와 손을 씻을 때 외에는 거의 사용할 일이 없는 것 같다.


그가 있을 때는 면도를 할 때 썼었다. 그는 면도할 때 쉐이빙 폼 대신 비누거품을 썼었다. 그것조차도 나는 몇 번이나 그러지 말라고 말렸지만 그가 굳이 쉐이빙 폼 같은 건 따로 쓸 필요 없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에 가까웠다. 그러던 그도 지난해 봄에 떠났으니 우리 집 비누는 그야말로 할 일이 더 줄어들어버린 셈이다. 그래서 나는 그 알량한 미용비누 한 장을 1년째 쓰고 있다. 다 써가는 것도 아니고, 아직도 5분의 2 정도는 남은 상태다.


오래된 비누에서는 거품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실컷 문지르다 보면 이게 지금 손을 씻는 건지 마는 건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 경우도 많다. 내가 이까짓 비누 한 장을 아껴서 뭘 하겠다고, 그냥 버리고 새 비누를 꺼낼까 하다가도 아직 꽤나 남아있는 비누를 보면 또 막상 버리기에 주저하게 된다. 인터넷 어디서 본 바로는 오래된 비누가 거품이 잘 나지 않는 건 표면이 굳어서라고, 스타킹이나 양파망 같은 걸로 싸놓으면 비누를 문지를 때마다 오래된 표면이 벗겨져 나가 예전처럼 거품이 잘 난다고는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까지 한 장에 천 원 남짓을 주고 그나마 1년 정도를 쓴 이 비누를 써야 하는가 하는 철학적이기까지 한 문제에 오면 나는 잠시 회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무리 없이 산다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아침에도 뭔가를 좀 치우고 손을 씻으러 욕실에 갔다가 도무지 거품이 나지 않는 비누를 붙잡고 한참을 씨름했다. 아 정말, 손 한 번 씻으려다 가뜩이나 좋지도 않은 성질 더 버리겠다고, 오늘에야말로 저 비누 갖다 버리고 새 걸 꺼낸다고 이를 갈며 나왔지만 이 글을 쓰는 몇 분 안 되는 시간 동안 또 어차피 자주 쓰지도 않는 비누 그럴 것까지 있나 하는 식으로 마음이 허물어진다. 매사 이렇게 흐리멍텅해서 이 풍진 세상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을, 하나 되는 일 없는 월요일 아침부터 한다.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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