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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 산에 뜬 달 Feb 16. 2024

아버지의 자전차

지금은 없는 이야기. 자전차도. 아버지도

당근마켓에서 자전거 하나를 업어 왔다. 안장 뒤에 작은 짐받이가 있다. 딸아이는 거기에 답싹 올라앉더니 자기를 태우고 달리란다. 염려와 걱정을 담아 거절하지만 통할리가 없다. 작고 마른 녀석이라 수월하게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균형을 금세 잃고 핸들을 잡은 손이 흔들거린다. 녀석은 불안정한 스릴이 주는 즐거움에 꺅 꺅 소리를 지르고 내 허리를 꼭 끌어안는다. 그 기세에 애써 잡은 중심이 다시 흔들리고 만다. 딸아이와 같이 뒹굴어 그녀가 다칠까 두렵다. 손이 땀으로 끈적해진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신 아버지의 등 뒤에 타고 시골길을 달리던 기억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막 취직을 했을 무렵 아버지도 경기도 북쪽 휴전선과 가까운 동네에 있는 한 공장의 창고 관리인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부지내 얼기설기 지어진 허름한 집에 머물며 시설을 경비하고 창고 옆 노는 땅에는 푸성귀를 심으셨다. 엄마는 자주, 나는 아주 가끔 그 곳을 방문했다.   
   

그 공장 창고는 의정부역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들어간 곳에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내리는 버스 정류장까지 나를 데리러  나오셨다. 자전차를 가지고. 아버지는 자전거를 자전차라고 불렀다. 의정부역에서 버스 타기 전에 전화로 미리 알렸지만  아마 아버지는 정류장에서 나를 꽤 오래 기다리셨을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는 나를 발견하면 아버지는 애써 반가운 표정을 숨기고 타라! 짧게 말씀하신 후 자전거 짐받이를 탕탕 두드렸다.

아버지는 나를 태우고 불퉁한 시골길을 이십여분 달렸다. 시멘트가 남을 때마다 생각난듯이 조금씩 부어놓은것 같은 길은 움푹 움푹 패인 부분이 많았다. 아버지의 자전차는 솟구치듯 오르내렸고 그때마다 놀라 아버지의 허리춤을 부여잡았다. 만나면 서로 말도 없는 아버지와 이렇게 붙어 앉아 허리를 끌어안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는 마치 그 옛날 염전의 물레방아를 돌리듯 꼭 꼭 눌러가며 페달을 밟으셨다. 나는 침묵과 어색함이 견디기 어려워 농가와 공장들이 뒤섞여 신산스러운 그 동네 먼 곳, 산과 하늘이 만나는 지점 어딘가로 시선을 두었다.  

    

아버지와 그렇게 가까이 닿아 있 적이 있었다. 유년시절을 보낸 내 고향 충청도 작은 섬마을. 아버지는 나를 목말 태워 내 또래 사내아이가 있는 아랫집에 내려놓고 바다일을 나가셨다. 그 시절 아버지는 젊고 잘 웃고 다정했다. 하지만 곧 우리는 뭍으로 올라왔고 아버지는 노동과 담배와 술에 골고루 찌들어 빠르게 늙어갔으며 가끔 패악을 부렸다. 더 이상 우리에겐 그 시절처럼 따숩고 은근한 추억들이 생기지 않았다.

목말을 태워주던 아버지. 자전거를 태워주던 아버지. 흔들리는 자전거가 애써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탁 하고 튀겨 올린 모양이다. 그립고 아득한 느낌에 놀라 씁스름하게 웃는다.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는 작은 손이 보인다. 어깨에 힘을 빼고 페달을 꾹꾹 눌러 밟는다. 자전거는 곧 딸의 무게를 이기고 균형을 찾아 부드러운 궤적을 그리며 나아간다. 움푹 패인 상처 없이 평탄한 길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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