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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 산에 뜬 달 Mar 28. 2024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열세 살 여공의 삶>, 신순애 지음, 한겨레출판

<열세 살 여공의 삶>, 신순애 지음, 한겨레출판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다. 나는 예전에 이 노래를 흥얼흥얼 천진하게 불러 제꼈다. 얼핏 들으면 빠르고 발랄한 느낌의 이 곡은 꽤나 유행이 되어 민중가요의 저변을 확장했다. 하지만 가사를 찬찬히 곱씹어 보면 노래가 담고 있는 노동현실은 대단히 무도하다. 노래속의 여성노동자들은 계절이 바뀌며 그려내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 계속되는 야근과 철야로 밤 하늘 별 한번 올려다 보지 못한다. 그들의 머리위엔 반짝이는 별 대신 백열등이 작열한다. 과로와 영양실조로 백열등을 닮은 파리한 낯을 한 채 공장일을 하다 보면 시절은 한 바퀴 돌아 다시 봄이 온다. 색색깔 꽃들이 피거나 말거나 나비들이 담장위로 날아다니거나 말거나 쉴 새 없이 미싱을 돌려야 한다. 이런 삶을 형식과 내용의 지독한 대비로 그려낸 노래다. 지금도 어느 순간 이 노래가 입에 떠올라 흥얼거리다가 왠지 모를 저릿함에 부르다 말고 노래끝이 흐려지고 마는 것이다.



열세 살 여공의 삶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빈약한 정통성 문제를 '선성장 후분배'의  경제 성장을 꾀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다. 이 신화를 이루기 위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 제단에 바쳐졌다. 혹독한 노동착취와 저임금이 당연한 시대였다. 특히 60, 70년대 여자들은 집안의 남자 형제들의 학업을 지원하기 위해 중등교육 이상을 시키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속에 어린 나이부터 공장노동에 내몰려야 했다. 최근에 그 시대를 온몸으로 겪으며 치열한 삶을 보낸 여성이 직접 쓴 책을 들게 됐다.


신순애씨의 <열세 살 여공의 삶>이다. 그녀는 열세 살에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미싱 시다로 공장생활을 시작한 후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각성하고 노조활동가로 성장해 굵직한 투쟁들을 겪으며 가혹한 고초를 겪은 분이다. <전태일 평전>에서 여공들의 생활을 쓰기 위해 취재가 필요했던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씨를 통해 소개받은 이가 바로 신순애씨다.


신순애씨는 <전태일 평전>에서의 '불쌍한 여공' '힘 없는 여공'에 머무르지 않고 '노동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힘주어 썼다. 저자는 많은 노동관련 책과 논문들이 '지식인'에 의해 씌어져 거대 노동 담론을 분석하거나, 굵직한 노동 운동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 남의 해석을 거치지 않은 생생한 자신의 역사, 노동과 투쟁의 경험을 담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삶의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 내며 느꼈던 자부심, 자립심, 삶의 애환과 희로애락을 직접 증언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런 지점에서 귀한 책이다. 투쟁사나 담론중심의 서적이 아닌, 그 역사의 현장에서 있었던 당사자인 여성노동자가 직접 자신의 삶과 시대를 생생하게 서술하고 해석한 책이 드물기 때문이다.



7번 시다, 3번 미싱사, 1번 오야에서 신순애로

열세살에 공장 생활을 시작한 신순애씨는 숙련공인 미싱사 오야가 되도록 번호로 불리워진다. 하지만 미싱사 최고봉인 오야가 되어도 이름으로 불리워지지 못하는 것은 여전했다. 그녀는 전태일이 불꽃으로 화한 결과로 만들어진 '청계노조'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된다. 책에서는 '다시 태어났다'고 표현하고 있다. 노조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녀의 건강을 염려하고, 그녀의 권리를 알려주고, 그녀를 교육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시키는 일'만 고되게 하는 '불쌍한' 처지에서, 나의 존재 의미와 권리를 찾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능동적으로 하며 같이 성장한다. 쓸모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인정받는 벅찬 경험을 노조에서 하게 된다. 그녀는 노조라는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감을 얻어 <퇴직금 쟁취>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투쟁에 참여하며 성과를 낸다.



사라져간 여성 노조활동가들 

기쁨은 길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구속되어 감방에 갇혔다. 감옥에서 그녀는 말로만 듣던 우엉이나 연근 반찬을 처음 먹어보며 허탈해한다. 노동자의 삶이 죄인보다 못하다는 것, 죄인의 음식보다 더 못한 음식을 먹으며 방세걱정, 연탄걱정으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왔구나 깨닫게 된다. 신순애씨는 출소이후 지속적으로 정부당국이나 기업들에 의해 '빨갱이' 낙인,  '블랙리스트'로 관리당하며 고립된 삶을 살게되는데, 이것은 신순애씨와 같이 활동했던 여성노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삶은 지속되었고 그녀는 위치한 곳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내었다. 쉽게 밟히지만 몇번이고 다시 일어나는 삶을 살았다고 회고한다.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활동으로 꼿꼿하게  그 시대와 그들의 삶을 증언하고 있다.



지금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내가 사는 구로는 신순애씨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시대, 박정희 정권이 논과 밭을 강제로 강탈해 건설한 수출공단이 있는 지역이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수출의 여신상' 옆을 지나 '수출의 다리'를 건너 '디지털 산업역군'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예전에 가리봉역이라고 불리던 가산디지털단지역을 지난다. 밤새 조명이 꺼지지 않아 '구로의 등대'라고 불리는 유명한 게임 회사 건물도 지나친다. 그 건물옆을 지나갈때면 미싱 돌아가듯 컴퓨터 팬후드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많은 회사들의 본사가 입주한 그 거대한 건물앞에는 농성을 하는 노동자들의 천막을 가끔 볼 수 있다. 기업들은 노동자들의 농성과 파업으로 천문학적인 막대한 손해를 입다며 손해배상소송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 천문학적인 이익은 그동안 도대체 누가 만들어 냈단 말인가. 그 아이러니와 부조리가 아득하다. 차갑고 미끈한 이 첨단 건물은 50년전 전태일과 신순애가 일하던 백열등이 타닥타닥 타던 청계시장과 무엇이 다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이 영화는 이혁래, 김정영 감독이 만든 영화로, <열세 살 여공의 삶>을 쓴 신순애씨가 출연한다. 청계노조에서 신순애씨와 같이 활동했던 이숙희씨, 임미경씨를 비롯한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치열했던 삶과 투쟁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는 그 시절 어린 여공들은 올려다 볼 수 없었던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로 시작한다. 초록이 눈부신 탁 트인 구릉 위 잔디밭에 세대의 미싱이 놓여있고, 세 여성은 깔깔깔 웃고 장난치며 행복하게 미싱을 돌리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어둡고 침침한 공장 창백한 백열등 아래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일했던 그녀들은 이렇게 일하는 거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할 수 있다며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영화는 그녀들의 목소리를 감동적인 연출로 충실하게 담았고 나는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울고 웃었다.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이혁래 김정영 감독, 신순애 이숙희 임미경 출연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은 웨이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wavve.com/player/movie?movieid=MV_ST01_ST000000075&autopla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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