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셀프라는 말은 이제 너무 흔하고 당연한 말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말한다, 구원이라는 건 애초에 없는 거라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고통을 헤쳐 나오는 데에 타인의 역할이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통에 처한 사람은 구원이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게 내가 믿는 바다.
구원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또는 나를 채찍질하면서 고통에서 빠져나오기를 발버둥 친다. 구원이 온다면 좋은 일이다. 당신은 구원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마법같이 자신을 온전하게 꺼내줄 구원은 오지 않는다. 구원이 오지 않으면 원망에 분노에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혐오에 잠식된다. 왜 나에게는 구원이 오지 않지? 세상은 왜 이렇게 내게 잔혹하지? 내가 뭔가 잘못해서, 내가 부족해서, 나는 무가치하고 소중하지 않은 존재라서 그런가 봐. 구원에 대한 믿음은 자주 사람을 추락시킨다.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그런 주제에 쓸데없이 인과의 관계는 촘촘하다. 그것들이 얼기설기 얽힌 거대한 톱니바퀴 덩어리는 잔인하게 사람을 짓밟는다. 그런 데에 이유나 원인은 없다. 아니,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옳으니까 납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사람은 짓밟히고도 살아남는다. 살아남는 것에도 대부분 거창한 구원이나 이유는 없다. 작은 도움과 선의가 모여서, 스스로 발버둥 쳐서, 그냥 시간을 버텨내서, 또는 그 모든 이유가 각자의 비율로 혼합되어서. 구원 없이도, 정확히 말하자면 기적 같은, 보통은 사람의 형태로 형상화되는, 백마 탄 왕자님처럼 사랑의 키스로 나를 죽음에서 다시 온전한 삶의 영역으로 되돌려줄 마법이 없이도 사람은 살아남는다. 죽음 지척의 흔적은 남는다. 때때로 사람은 너덜하게, 흉터와 상처 투성이인 상태로, 이따금은 사지 하나쯤 없는 정도로의 상태로도 살아남는다.
구원이 없다고 되뇌는 건 나를 겸손하게 만들려는 자기 세뇌이기도 하다. 살아남은 나는 살아남고자 했던 절박함을 기억한다. 입이 틀어 막혀서 간절하게 손을 내밀던, 손아귀 사이로 에일 듯한 공허만 스쳐가던 겨울을 기억한다. 살아남자마자 나는 그런 사람들을 구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구원이라는 건 없는 것이다. 내가 멋대로 구원이라고 생각한 것이 상대에게는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손을 내밀고 도움을 건네도 그것을 받을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받아도 그것이 별것 아니게, 구원의 지척에도 못 닿을 만큼 사소한 도움일 수도 있다. 나는 그냥 내 멋대로, 내 만족을 위해서 내 오만한 방식대로 도움을 흩뿌리는 것이다. 도움이 됐다면, 미약하게나마 위로가 됐다면 다행이다. 아닐지도 모른다. 내 멋대로 건넨 도움이 누군가에게는 모욕일지도 모른다. 뿌리친 손에 분노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되뇐다. 나는 어디 높은 단상에 올라서서 도움을 베풀고 시혜하는 구원자가 아니야. 나는 그냥 초라하고 이기적이고 무지한 인간이야.
구원은 없다. 그래도 괜찮다. 마법 없이도 사람은 살아남을 수 있다.
구원은 없다. 나는 그런 거대한 것을 줄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그걸로 됐다.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더없이 인간적이다. 삶을 잔인하게 짓밟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도, 짓밟힌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그런 세상을 증오하고 원망해서 불태우고 싶은 것도, 세상을 사랑해서 낫게 만들고 싶은 것도 모두 인간.
세상은 어쩌면 인과관계의 거대한 덩어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눈덩이처럼 굴러가서 지나가는 길마다 사상자를 내는 괴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냥 이어져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모든 것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연을 잇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잔인한 일도 더없이 다정한 일도 일어나는 게 아닐까. 인간(人間), 사람 사이의 일들. 사람, 사람 사이의 거미줄처럼 복잡한 이어짐, 그리고 그런 사람과 사람이 맞물려 살아가는 세상.
나는 그런 걸 사랑한다. 구원이라는 거창한 단어보다는 사소하고 초라한 것들이 이어져서 거대하고 아름다워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