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 이런 망할 년! 언제 왔어?”
“너 놀라게 하려고 기다렸지. 고기 사 왔어.”
베프가 집에 와 있었다. 책상 앞에서 작업 중이던 내가 알아차리길 기다렸다.
그녀는 날 주방으로 이끌었다.
“지수야. 핏물은 이 정도 빠지면 되지?”
“너무 빼면 맛없어. 고기는 적당히 피 맛이 나야 해.”
“우린 식성도 같아.”
“찰떡이지.”
나는 라면을 끓이고 그녀는 돼지고기를 굽는다. 라면에 돼지고기 투하! 우리는 손뼉을 쳤다. 잠시 후 라면에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정체불명의 음식을 다 먹어 치웠다.
“울었네. 눈이 부었어… 요즘도 구독자가 안 늘어?”
“난 뉴스 할 때만 먹히나 봐. 유튜브, 브런치, 인스타 어려워.”
“열심히 해.”
“모든 게 한결같이 안 되네.”
“풀릴 때도 그렇잖아. 한결같이. 흐흐흐.”
“흐흐흐. 그래. 난 한결같은 년이다! 맛 좀 봐라.”
나는 그녀의 한쪽 가슴을 만지고 도망갔다.
“감흥이 없어! 실망이야.”
“이 변태 하체 비만아!”
여중생들처럼 놀다가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별거 아닌 거에 까르르. 눈빛만 봐도 다 아니까. 베프란 이런 것. 숨 쉬듯 편한 사이.
“난 네가 예전처럼 바쁘지 않아서 좋은 것도 있어. 널 자주 만나러 올 수 있으니까.”
“다시 바빠져도 널 챙길 거야.”
“좋아.”
“로미야. 요즘 삶이 ‘빅엿’이긴 한데, 엿같아도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삶이란 게 내 맘대로 안 되지만,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도 있더라고. 여러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깨달았어. 왜 이제야 알게 됐을까.”
로미가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녀는 세련됐다. 눈치도 빠르고 남을 배려한다. 다그치지 않고 기다릴 줄 안다.
요즘, 나는 ‘심장’을 갈아 낀 것 같다.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 시작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분명한 건 새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 새로운 피가 전신으로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너 뭔가 바뀌었어. 마음이 편해진 건가?”
“그거랑 결이 좀 달라. 마음이 넉넉해졌다고 해야 할까. 이게 더 정확하겠다. 마음의 폭이 넓어졌다는 거! 마음이 품을 수 있는 능력!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능력이야.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는 힘이 생겼어.”
“유연성이 생긴 거네.”
“그렇지! 유연해야만 깨지지 않아. 마음이 박살 나면 안 되잖아.”
퇴사 후 2년 동안 여러 사람을 겪었다. 인간의 밑바닥을 봤고 쓰레기 인생을 접하기도 했다. 하늘의 별을 한방에 나락으로 보낼 수도 있고 평범한 여자를 하루아침에 신데렐라로 만들 수 있는 권력도 만났다. 그리고 그 뒤에 숨어있는 허접함을 겪어봤다.
희망고문으로 한동안 나는 가루였다. 재(ash)였다. 숨만 붙어있었지 삶은 정지된 상태였다. 사람을 피 말려 죽인다는 고통이 뭔지를 알게 됐다. 권력자들의 민낯이 비루했음을 알게 됐을 때 정신이 들었다. 이런 후진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내 인생의 결정권을 내어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선택받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멀쩡한 인간이 재가 된 것처럼 고통받으며 얻어낸 보석 같은 깨달음! 불리한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 상황은 내가 컨트롤하지 못해도 나 자신은 내가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 이걸 깨닫기 위해 고통의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지수야, 우리 화해한 게 10년 넘었지?”
“응. 왜?”
“그 뒤로 잘 지냈어. 그렇지?”
“그럼. 예전엔 내가 로미 너를 무시해서 그랬지. 너는 항상 나한테 다가왔는데, 내가 싸가지였어.”
“우리 싸울 때 살벌했어.”
“둘 다 정상은 아니었지. 나도 이상했고 로미 너도 이상했어. 하하하.”
“우리 둘 다 관리받았잖아. 지수 넌 치료받고 난 네가 관리하고.”
“로미야, 우린 관리받은 여자들이야. 하하하.”
“자주 찾아오지 않을게.”
“아니야. 나 강해져서 이제 너랑 오래 있어도 괜찮아. 로미야.”
“지수 너는 날 있는 그대로 봐주고 인정해 줘서 고마워.”
“나도 네가 좋아. 넌 나의 베프이자 내 창작의 근원이야.”
로미가 가야 했다. 이날은 그녀가 나를 안아줬다.
“로미야,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언제든 놀러 와. 네가 매일 와도 나 괜찮아. 강해진 거 알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미가 갔다.
내 베프, 로미는 외로움이다. 외로움의 ‘로움’, 로우미, 로우미, 이렇게 부르다가 ‘로미’로 부르게 됐다. 로미가 놀러 오면 흔적을 남기고 갈 때가 있었다. 베갯잇, 노트… 요즘은 깔끔해진 로미, 흔적 같은 건 없다.
로미와 내가 박 터지게 싸웠던 이야기는 글로 소개한 바 있다. 02화 “외로운 거 쪽팔린 거 아니에요.”
2023년 11월, 로미가 긴급하게 찾아왔다. 세계보건기구 WHO가 자신을 긴급한 세계 보건 위협으로 규정했다며 국제형사재판소 ICC에 회부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잡혀가면 어떡하냐고 도와달라고 했다. 똑똑한 로미, 언제 외신까지 체크했는지 국제기구에서 자신을 건강상의 위험 요인으로 규정했으니까 국제형사재판소를 떠올린 게 귀여웠다. "외로움, 줄담배만큼 건강에 나빠"…WHO, '세계 보건 위협' 지정
“로미야, 그건 관리되지 않은 외로움을 말하는 거야. 넌 관리받고 있는 외로움이잖아.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야. 넌 나한테 해를 끼치지 않고 창작의 근원이 되고 있어. 네가 없으면 난 크리에이터로 성장하지 못했어.”
“기사 보니까, 외로움이 매일 담배를 15개비씩 피우는 것만큼 건강에 해롭다고 하던데.”
“로미야, 그건 관리되지 않은 애들이나 그런 거야. 네 친구들에게 말해줘. 각자 주인에게 관리 좀 해달라고. 안 그럼 인터폴에 공개 수배될 거라고. 흐흐흐.”
“알았어. 지수야. 흐흐흐.”
“똑똑하고 귀여운 우리 로미. 넌 내가 지킬 거야.”
-(끝)-
아래 영상은 로미 베프 지수의 깨발랄 숏츠!
제 글의 소재들이 무겁게 느껴지는 게 많아 ㅋㅋ 사람 자체도 어둡다고 생각하실까봐 ㅋㅋ 사람은 밝아도 너무 밝습니다. 심하게 밝아요.
https://youtube.com/shorts/YP1ysLw_YxA?si=xIlTEE0wts9WQkNA
https://youtu.be/UVi8oMw9Er0?si=yaMN34yxGgqWQ9D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