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췌~~~크!'
현관 앞 전신 거울로 얼굴 한번 훑고 밖으로 나가다 멈칫.
‘구슬은 잘 있는 거지? 잘 챙기자.’
외출 전 체크 포인트다.
수년 전 마음을 다치고 회복한 이후, 나는 조련사로 거듭났다. 감정 조련사. 마음속 여러 감정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고 이 감정들과 ‘밀당’한다. 마음의 주인에게 소외당하고 있는 감정은 없는지, 문제를 일으킬 만한 감정이나 과열된 감정은 없는지 점검한다.
과거 나는, 다혈질에 성격은 급하고 일 중독까지 ‘폭주하는 기관차’ 같았다. 일들은 척척척 성과를 냈지만, 감정적으로는 시한폭탄을 매단 상태였다. 임계점에 다다른 감정을 누군가 건드리면 폭발했다.
그럼에도 성격 좋다는 평은 따라다녔다. 이것과 관련해 퇴사 후 알게 된 불편한 진실 하나가 있다. 배려할 줄 알고 피해 주지 않으려 노력하고 세심히 살피고 따뜻하게 대하는 것, 이건 진심이었으나 이와 별개로 깨달은 사실이란.. 마음씀이 언제부턴가 전략으로 바뀌었다는 것. 일을 사랑하면서 중독된 상태였던 나는, 과한 욕심에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전략으로 변질된 것 같다.
잘 지내다가도 일 년에 한두 번은 폭발했다. 화는 참을수록 응어리져 엄청난 파괴력을 냈다. 누군가 내 심기를 건드리고 이게 근거 없는 공격이라는 신호를 감지하면 돌아버렸다. 화를 돋운 상대의 허점들을 공격했고 벼랑 끝으로 몰았다. 나는 야비했다. 참을 때만큼은 진심이었으나 결국 폭발했다.
분노가 폭발한 후 남는 건 슬픔이었다. 이 매가리 없는 슬픔이 지긋지긋했다. 상대를 죽일 듯이 공격하고 아작 낸 후에 슬픈 감정이 든다는 게 소시오패스 같아 보일 수도 있다. 한때는 내가 소패가 아닌가 생각했다.
‘또 일을 저질렀구나’, ‘어떻게 이런 독한 말을 할 수 있을까’, ‘구제 불능’
비난의 화살은 나에게 향했다. 자책하고 스스로 원망하고 혐오하고 후회했다. 슬픔이 밀려왔다. 진이 다 빠진 상태에서 느껴지는 슬픔은 매가리 없는 슬픔. 무력한 슬픔.
회사 옆 공원에 있는 나무에 찾아갔다. 나무는 10년 넘게 나를 지켜봤다. 회사에서 절대 울지 않는다는 자신과 한 약속 때문에 그곳에서 눈물을 흘렸다.
마음을 다쳐봤고 시행착오 끝에 회복하면서 여러 감정을 다루는 노하우가 생겼다. 우울, 불안, 공황, 분노를 비롯한 감정들은 이제는 다루기 어렵지 않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감정이 슬픔이다. 슬픔은 어렵다.
왜 슬픔이 잘 다뤄지지 않는지 고민이 많았다. 내 우울의 근원이 슬픔이라는 것에 주목할 수 있었다. 슬픔의 농도가 너무 짙어 스무 살의 나는 숨 막혔다. 살기 위해 우울해지기로 했다. 그 뒤로 완벽하게 우울했다. 시간은 흘러 우울을 다스리게 됐고 다른 감정까지도 다룰 수 있게 됐다. 가장 오래 문제로 작용했던 감정이 슬픔이었기에, 해결하기까지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전까지는 세심히 지켜봐야 한다.
눈물이 소모적으로 되는 게 싫어 울지 않는다. 내 안에 삼키지만 이게 꿈틀거릴 때가 있다. 슬픔이 올라올 때 목구멍이 뜨거워지는데, 이걸 ‘경고 시그널’로 받아들인다. 정신 차리라는 신호.
어떻게 해야 할까. 감정의 영역이지만, 이성을 각성시킨다. 슬프다는 팩트를 받아들이면서 왜 슬픈지에 관해 머릿속으로 정리한다. 기사를 쓰듯 육하원칙에 따라 현재의 슬픔에 관해 정리하면, 마음도 정돈된 상태가 된다. 때로는 기록한다. 써서 보면 정확하게 보인다.
난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보질 못한다. 슬픈 소설도 최근부터 볼 수 있게 됐다. 전문기자로 활동할 때 호스피스 병동 취재, 희귀‧난치병 환자들을 취재할 때 많이 힘들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 희망을 잃은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마음은 무너졌다. 진정제를 먹고 간 적도 있었다. 너무 힘들 것 같을 때는 후배가 대신 인터뷰를 갔다.
내 마음속에 있는 슬픔은 유리구슬이 됐다. 눈물이 모여 결정체를 이뤄 투명한 구슬이 만들어졌다. 유리구슬. 슬픔을 일으키는 것들이 그 안에 있어 깨끗하게 잘 닦아줘야 한다. 나의 슬픔은 세심한 돌봄이 필요한 상태이기 때문에.
유리구슬이 튀어나오나 살펴야 한다. 슬픔이 차오를 때 구슬도 함께 올라올 수 있기에. 눈물이 날 때 긴장한다. 격해지지 말라는 경고 시그널이 작동하는지 살핀다.
이때 마음이 말을 건다. 슬프다는 감정은 인정하되,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 알아야 한다고. 슬퍼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라고. 허비되는 눈물은,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고.
여러 감정을 들여다보고 매만지고, 특히 유리구슬을 잘 챙기며 닦아주는 일상. 덕분에 오늘도 나는 글을 쓸 수 있다.
-(끝)- https://youtube.com/shorts/YP1ysLw_YxA?si=xIlTEE0wts9WQkNA
https://youtu.be/UVi8oMw9Er0?si=yaMN34yxGgqWQ9D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