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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ㅡ Sep 25. 2022

70kg에서 48kg으로 살아가는 유쾌하지 않은 방법

- 절대 비추 -


'다이어트'

새해 결심에 빠지지 않는 인기 항목이자, 아마 많은 사람들 인생 숙원일 터이다.

역시 시간 그러했다.




중학교 중반까지 외관적으로도 학생기록부의 수치으로도 최상의 비만 상태를 유지해 왔다. 그때까지는 '다이어트'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려 적이 없었다.


중학교 때 엄마가 떡볶이 가게에서 꼬마김밥 싸는 일을 하고 계셨고, 돌아오는 길에 항상 남은 순대와 그의 내장 친구들, 각종 튀김, 떡볶이를 싸 오셨기에 매일 잠들기 직전 분식으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잠들었다. 그것이 요즘 말하는 '야식'일터인, 당시에는 아무런 고민없이 엄마 손에 들린 기름기가 반질거리는 검은 봉지를 어 야무지게 꼭꼭 씹어 한 점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매일 마다. 

캄캄하고 고요한 식탁에 혼자 앉아서.

맛있었지만 어떤 날엔 지독히 슬픈 맛이었다.

나를 위해 이것을 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래서 언제나 다 먹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어느 날 엄마가 119 구급차에 실려가 한 달 동안 중환자실에 머무르며 아빠는 병원에서 출퇴근하게 되면서, 집 39kg의 몸무게를 가진 조그마한 할머니, 초등학생의 동생과 중학생의 나, 이렇게 셋이 한 달을 지내게 되었다.

병원을 가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땐 즉석식품들이 없었던 터라 내가 식사 준비를 해야 했는데, 나는 압력솥을 쓰는 방법조차 알지 못했다. 고요한 집에 왁왁 섭게도 어대 압력솥 뚜껑작은 딸랑이가 너무나도 무서웠다. 한심하면서도 슬펐다.


렇게 '먹는 일'은 단번에 잊혔다.

생사를 넘나드는 엄마의 소식 앞에서 무언가를 입에 넣삼키는 것 죄책감이 들었다. 슬펐고 무력했다. 그즈음의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만큼.



그렇게 엄마 부재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단번에 그 많던 살들이 소위 키로 가면서 순식간에 날씬한 사람의 부류에 속하게 되었다. 덕분에 격렬하게 크느라 양 무릎에는 피부가 가로로 터져버린 자국들이 고스란히 많이도 남아있다. 엄마가 유독 싫어하시는 나의 일부이지만, 내겐 잘 성장했다는 훈장일 뿐이다.


그리하여 얻게 된 167cm의 키와 48kg의 몸무게.

그것은 내가 의도했던 것 아니었고, 그런 사실을 스스로 인지조차 못했을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보는 사람들마다 깜짝 놀라 알게 되었을 뿐.




20살! 서울 소재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동시에 적정 연령에 도달한 나는 달콤한 음주생활에도 접어들었다. 온전한 자유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마나 만끽했냐고 묻는다면, 내 몸무게로 증명해 줄 수 있었다.


9개월 만에 부모님을 방문했을 때 내게 문을 열어주시고는 다들 놀란 토끼눈이 되어 감탄사만 연발하셨다.

래서 체중계올라가 보니 앞자리가 '7'이 아닌가! 이것 또한 내가 의도했던 바가 아니었고, 그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난 당 엄청난 힙합 패션으로 옷과 신발이 엄청나게 컸으니 몰랐다.

이렇게 가족들이 깜짝 놀라 알게 되었을 뿐.


 이후, 난 나의 몸무게에 조금 관심이 있었다. 가족들이 건강을 걱정하기도 했고, 짓궂은 친구들이 놀려대니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가락을 들면 그런 몸을 가지고 다니면 안 불편하냐는 둥, 그런데도 음식이 넘어가냐는 둥, 삽한 눈빛으로 신나게 재미들이 나있는 표정이었다.


음으로 느껴본 감정이었다. 숟가락에 밥을 올려 입안에 넣는 행위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러니하게도 그때 난 분명 행복했다. 


행복함으로 몸이 토실토실 부푼 느낌. 그들 덕분에 외롭지 않았기에 놀려대는 이들도 밉지 않았고,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하고 마음까지 토실토실했다.


길지 않았던 시간이었기에 아깝고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자, 내 어두운 마음에 보석처럼 박혀 언제 꺼내어도 눈부시게 아름답던 시간들이다.


 몸이 가장 부풀어 있던 시절,  마음도 부풀어 가장 신이 나있었다.




얼마 지나않아 항상  곁을 함께 해주던 친구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세상을 떠다. 겪어본 적 없는 슬픔. 견디기 힘들었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슬픔. 한동안 말을  못했다. 밥 먹을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고,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조그마한  한켠에 혼자 돌처럼 굳어 지냈다. 


그렇게 다시 48kg의 나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때부터 먹는 것에 크게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어려서였을까 그런 와중에도 배 고팠, 울면서우적우적 입에 먹을 것들을 구겨 넣었던 기억도 난다. 그런 나 자신이 흉악스럽게 싫었고, 그 어느 날도 예전처럼 유쾌하지 않았다. 그렇게 삶의 흥미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25살! 

졸업 직전 국세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곧장 발령이 났다. 1년을 해보니 이것은 내가 예상했던 일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고 늘 소화불량과 위염에 시달리다, 어느 날 회식 때 먹은 고기를 이틀이 지난  다 토해내면서 그날부터 지금까지 고기를 먹지 못한다. 구워진 까슬까슬한 고기가 목을 타고 넘어오면서 칼로 긁는 듯이 아팠는데 그 고통이 트라우마를 남긴 탓이다.


여하튼 직장생활 이후 먹는 것이 극도로 싫어졌다. 흥미를 잃은 수준이 아니라 밥을 먹는 행위 자체가 싫어졌다. 


먹는 것이 즐겁지 않았고, 불편한 사람들과 함께 매일 앉아 먹어내어야 하는 상황도 유쾌하지 않았으며, 에 파묻혀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그 시간만큼은 억지로 미소 지으며 즐겁게 먹어내야 하는 점심이 싫었다. 이것이 보통의 어른 사람이 매일 겪어내야 하는 점심식사의 무드인지, 아니면 나느끼던 유독 별 감정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지금까지 나는 커다란 변화 없이 48kg의 몸무게로 살아는 중이다. 이것도 내가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 순전히 아픔과 고통으로 다다른 수치일 뿐이다. 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수치상으로는 좋아 보이는 이 신체조건의 실체는 완전히 다르다. 강검진 상으로도 빼곡하니 결과가 좋지 않고, 외관상으로도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며, 정신적으로도 이렇게나 엉망이다.

 

많지 않 삶의 재미 중에 난 '먹는 재미'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찾으려고 나름 애를 쓰고 있지만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걸 찾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돌아보니 내 몸무게는 인생의 마음 곡선과 함께 했던지도 모르겠다.


 몸이 터질 것 같던 그때 조금 더 신이 나 있었고 덜 슬펐으며 정신적으로도 튼튼했다.

 



결혼 전 남편이 인사를 드리려 부모님 댁을 방문했을 때 먼지가 뽀얀 나의 사진첩을 내오셨고 다 보고 나서 그는 물었다.

"대학교 때 사진이 하나도 없네!"

내가 속으로 말해줬다.

'당신이 놀랄까 봐 숨기셨나 봐. 그런데 난 숨겨진 그 시절이 참 좋았어. 아마 제일 좋았을 거야.'



그런 때가 내게도 분명히 있었다.

'함께' '먹는 것'이 행복했던 때. 

정작 그땐 몰랐다. 내가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먹는 것에 취해 행복함에 취한 나를 인지하지 못했을 테다.


이제 오랫동안 저점을 유지하던 나의 몸무게 곡선도, 인생그래프도 바닥을 찍은 것 같으니, 먼저 꼭꼭 숨어버린 '먹는 재미'부터 찾아내어보려 한다.


'먹는 재미'
내가 널 꼭 말 테다!


자, 그런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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