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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 거야..'

by 린ㅡ


'죽일 거야..'

아이의 휴대전화에 수신된 메시지에 나는 금시에 죽고 싶어졌다. 나는 고작 그런 엄마였다. 아무리 끈덕지게 엄마라는 감투를 써도 어른이 되지 못했다.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 아이가 하교 후에 쫓기듯이 집으로 달려들었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고 눈물이 그렁거렸다. 초등학교 6년의 시간 동안 유난하게 혼자 지내온 아이, 어렵게 휴대전화를 꺼내 내게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게 언제나 착하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나에 대한 그들의 공통된 문장이 도대체 어떤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웃는 모양새로 타고난 눈의 형상 때문인지, 우당탕탕거리지 않고 가만하게 앉아 있는 무기력함 때문인지, 말대답을 하지 못하는 소심함 때문인지,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었으나,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착한 이로 보이는 내가 한 세월을 살아보니, 나는 불편한 사람이 편다. 불편해서 허물어지지 않은 이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앞에서는 쉽게 허물을 벗었고, 나를 벗겼다. 그들은 내가 불편하지 않아 보였고, 나는 그들이 불편했다.


많은 이들을 마주하고서야 알았다. 그들의 말대로 나는 착한 사람이었다. 최소한 그들 속에 있으면 그래 보였다. 착해 보이는 내가 싫었고, 나를 착한 이로 만드는 다른 이들이 싫었다. 사람이 싫었고, 내가 싫었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어렵다. 매 순간이 고단하고 힘들다. 아이가 살아가는 세상과 그곳에서 마주하는 이들은 다르길 바랐다.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일이, 세상을 공유하며 함께 유영하는 일이 설레는 일이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나의 마음은 비밀이어야 했고, 마음을 숨기고 아이에게 찬란한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 착해 보이는 내가 거짓을 이야기하는 일은 고역이었다.




오랜 기간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지냈던 터라, 자신에게 처음으로 가깝게 다가오는 친구가 아이에겐 그저 기쁨이었을 것이다. 점점 수위를 높여 욕설을 보내고, 자신이 보낸 것이 아니라며 해킹당한 거라고 말하는 친구의 말을 감히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마음을 찌르는 마지막 말을 듣고서야 정신이 들었던지 내게 털어놓았다. 13살의 여자 아이가 쏟아낸 글자들은 말 그대로 마음속 자음들을 골라 버려 놓은, 문장도, 글도 아닌 쓰레기더미였다. 여과되지 못한 채 버려진 글자들의 마지막엔 언제나 온전한 문장 하나를 붙여놓았다.

'죽일 거야..'

잔인한 후렴구였다. 시간이 지난 못된 문장을 그저 옮겨 적는 일에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손이 떨리고 손끝이 시리다. 지나온 시간 동안 내 마음가지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비슷한 종류의 후렴구들이 단번에 역류했고, 그것들이 온 마음속을 표류하는 탓에 한동안 속이 좋지 않았다.




첫째 아이의 초등학교 말미에도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한 아이가 반 아이들을 돌아가며 괴롭혔고, 나의 아이만이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지 않고 말로만 대응하자, 학기 말에는 자신을 때리지 않고 착해 보이는 나의 아이가 타깃이 된 것. 그때도 괴로웠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용기 없고, 소리도 내지 못하던 반달눈의 내가 착하다는 이유로 겪었던 일들, 끝도 없이 떠오르는 기억의 끝엔 나 때문이라는 죄책감만 남았다. 간당간당하던 엄마라는 이름표는 그대로 낙하하여 산산이 부서졌고, 엄마라는 자격이 없는 내가 부린 욕심의 대가라며 스스로를 물어뜯으며 무참히 괴롭혔다.



여전히 하교시간을 확인하고, 아이의 얼굴을 살핀다. 아이는 자신을 살피는 엄마의 얼굴을 점검한다. 너의 순소한 검은 눈동자 속에 검은 슬픔이 비친다. 불안한 것들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요동쳤고, 나의 불안한 슬픔은 너의 눈 속에서 맹렬하게 일렁거렸다. 투명한 너를 통해 숨겨둔 나를 마주하는 일은 뭉툭해지거나 무뎌지지 않았다. 거듭할수록 두려웠다.


엄마란 무릇 연약한 아이의 몸과 마음의 방패막이가 되어 마주하는 일들을 함께 헤쳐나가며, 용기를 주고 고통을 나누는 이가 아닐까. 그런 것들이 엄마의 일이라면 나는 엄마가 아닌 같았다. 하교 후에 퉁퉁 불어 가라앉지 못한 나를 해사하게 바라보던 아이의 눈동자가 잊히질 않았다. 건전지가 모두 소진된 강아지 인형처럼 소리가 잘 내어지지 않았고, 작은 입꼬리조차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 학교 가 있는 동안 내 걱정하느라 힘들었지?"

어느 날엔, 둘째 아이가 하교 후에 날 꼭 안고 말했다.

"힘들지? 나는 엄마 없으면 안 되니까 아프지 마."

다른 어느 날엔, 첫째 아이가 자러 가려다 날 감싸 안고 말했다.


나는 고작 이런 엄마이다. 겨우 이 정도의 어른 사람. 저 문장들의 화자와 청자는 분명 반대여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무엇이든 해내는 원더우먼 같은 엄마도, 속이 꽉 채워진 어른도 되지 못했다. 나는 그저 고장 난 어른이었고, 절망할 일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무엇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망그러진 엄마라는 어른을 일으켜준 것은 아이였고, 형형한 미소로 환하게 밝혀준 이도 아이였다. 말랑하고 단단했던 두 품 덕분에 잔인한 후렴구를 함께 멈출 수 있었다. 안온하게 지울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아이가 해낸 일이라 생각하니 먹먹하게 용기가 났고, 쉴 새 없이 요동치는 마음도 매듭지을 수 있었다.





비슷한 일을 겪었던 첫째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때의 일을 겪은 이후로 아이는 불편한 감정을 불편하지 않게 표현하는 방법과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운 듯했고, 누구보다 신나게 학교를 다니고 있다. 나와는 반대로, 사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하는 법을 택했다. 다행이었다.


둘째 아이에게도 이 시간이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매번 햇살이 내리는 길만 내어줄 수 없는 일, 비바람 치고 눈 내리는 길을 함께 걷는 날이면 조금 더 넉넉한 내 품에 안아 고난을 나누는 일이라 생각하면 그만이다. 아이들의 두 품으로 강강하게 수리된 엄마는 이제라도 마음이 고단했을 아이에게 순하고 나긋한 것들을 모아 사랑을 전하고 싶다. 그저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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