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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 Aug 01. 2024

아내는
가끔 뒤를 돌아본다

아내의 어제 벗기

나이가 들면

새로움보다 이미 있는 것들과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다.

어제를 돌아보는 일이 내일을 살피는 것 못지않게 즐겁다.

내일의 놀라움보다 어제의 재발견이 좋다.

지난날의 이야기를 알면서도 같은 기대 같은 전율을 경험하고 싶다.

산다는 것은 매일 천천히 태어나는 것이라는 생텍쥐페리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어제의 나에게 눈길이 간다

좋아했던 목소리, 즐겼던 음악, 함께했던 얼굴, 뒹굴던 풀밭, 막걸리의 짜릿함은 위안이다.     


그럼에도 어제는 무릅써야 할 위험이다.

걸러야 한다.   

  





아내의 어제 벗기     

오늘도 아내는 내일 앞에서 머뭇댑니다.

그리고 어제를 돌아봅니다.

아내의 어제는 언제나 분주했습니다.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일도 많았습니다.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새벽부터 늦은 시간까지 뛰고 또 뛰었습니다.  

   

전화기는 늘 묵직했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이 저마다의 인연으로 얽혀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즐거움과 저 사람의 눈물로 전화기는 연신 몸을 떨었고 그럴 때마다 아내의 발걸음도 바빠졌습니다.     


숱한 세월 일에 치이고 사람에 부딪치며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렸습니다.

이 일 끝에는 달콤함이 있을 거라는 믿음과 이 사람과 함께하면 언제나 웃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일을 손에서 놓지 못했고 그 사람과의 연에 의지했습니다.      


그러던 전화기가 깃털처럼 변했습니다.

내일을 위한 재산이라며 자랑스러워했던 일을, 내일을 위한 보험이라며 소중히 간직했던 그 누군가를 아내는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수다한 세월 가슴에 품었던 수많은 인연의 끈이 가녀린 바람에도 흩어집니다.

그 어떤 상황에도 견딜 것 같았던 그와의 맺음도 세월을 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수많은 도움과 지지 대접과 환대의 인연에게도 끝은 있었습니다.       


‘오직 현재만이 우리의 행복’이라는 디오게네스의 말이 가슴에 닿아서일까

아내는 지난날의 손을 놓았습니다.


홀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온전하고 고요한 고독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꺼리고 불안함에 외면했던 외로움의 손을 잡았습니다.    

 



아내의 등 뒤로 고단한 시간들이 저뭅니다.

아내의 어깨엔 슬픔이 가만히 내려앉습니다.

아내의 시간에는 꽃잎은 지고 향도 어렴풋 멀어집니다.

열정적인 여름은 그리움으로 아프고

싱그러운 봄 꽃자리가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습니다.     


그들과 끝없는 기쁨의 길을 걷고 싶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꺼이 눈물도 흘리고 싶었습니다.

서로의 운명을 향해 웃고도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욕심이었습니다.




아내의 어깨를 조용히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어느 허공을 그리도 하염없이 바라보느냐고.

마음으로 묻습니다.     


정리는 필요를 내려놓는 일이라고 

요구를 멈추는 일이라고

이제 자기 존재의 촉감을 느껴야 할 때라고

나뭇잎 사이를 스치는 바람결처럼 속삭입니다.     


아내가 다시 꽃씨를 뿌립니다.

어제를 뽑은 자리에 무함마드가 마음에 필요한 꽃이라던 하얀 수선화를 심습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아내의 길이 외롭지 않도록 아내의 발자국 곁에 또 하나를 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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