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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y 05. 2024

영화 이야기 <잠>

분명 스릴러인데 일반적인 스릴러와는 다르다. 뭐라고 콕 집어서 이게 다르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끝까지 범인이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잠꼬대인 줄만 알았던 현수의 “누가 들어왔어” 이후 수진은 정말로 무언가가 현수의 몸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 무언가를 두고 의사는 병이라고 하고 무당은 귀신이라고 한다. 영화는 현수가 밤에 깨어나 돌아다니는 일을 병이라고도 귀신이라고도 딱 정해주지 않는다. 대신 보여주는 것은 정체불명의 무언가로 인해 뒤틀리기 시작한 두 사람의 삶이다.


의아한 점이 한 두 개가 아닌데 그 중에서도 특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수진이다. 현수는 자기 의지로 돌아다니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둘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건 수진이다. 현수는 병이 나을 때까지 스스로를 격리하겠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수진이 출산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고시원에 가서 당분간 살겠다고도 말했고 차에서 자려고 침낭도 꺼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 현수를 다시 집으로 들이는 건 수진이다.


왜 그럴까. 적어도 이 시점까지는 현수와 수진 모두 이것이 병이라고 믿었다. 수진의 엄마가 용한 무당을 소개시켜준다고 해도 수진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의사가 불치병이라고 했으면 또 모르겠는데 그런 것도 아니다. 병이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둘이 격리하는 게 서로를 위해 좋지 않을까. 현수가 단지 잠이 든 채로 집안을 배회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강아지를 냉장고에 넣어 죽이고 심지어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 한 적도 있었다. 이 정도면 수진이나 아이는 물론이고 현수를 위해서라도 격리를 하는 게 맞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수진의 한 마디에 생각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고시원에 가서 살겠다는 현수의 말에 수진은 이렇게 말한다. “콩가루 집안이야?” 병 때문에 잠시 가족끼리 떨어져 있는 걸 두고 콩가루 집안이라니. 오히려 현수의 이러한 노력은 바로 그 집안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니 수진은 편모 가정에서 자랐다. 엄마가 부적 운운하자 수진이 쏘아붙인 말은 “그래서 아빠가 돌아오기라도 했어?”였다. 뭔가 이상하다. 어쩌면 수진은 자신이 편모 가정에서 자란 것에 대해 남모를 내상을 입은 건 아닐까. 겉으로는 표가 안나지만 속으로는 온통 곪아 있는.


수진의 엄마는 현수가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 했다든지 혹은 강아지를 냉장고에 넣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수진에게 “내가 알아봤는데 이거 다 이혼 사유 된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도 니 애비 없이 너 잘 키”웠다는 얘기다. 적어도 엄마에게 남편의 부재로 인한 아내의 내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딸의 입장은 좀 다른 모양이다. 고시원에 가겠다는 현수의 말에 수진은 “문제가 생기면 함께 극복하는 게 부부”라고, “부부는 그렇게 쉽게 포기하면 안”된다며 못박는다. 현수가 배우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도 수진이 가리킨 것은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는 가훈이었다.


이쯤되면 수진의 내면에 분리 불안 혹은 결합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된다. 부부는 무슨 일이든 함께 하고 둘이서 극복하지 못 할 문제가 없다는 슬로건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다. 유연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완전히 떨어져 사는 게 아니라 잠만 고시원이나 차에서 자는 건데 그걸 콩가루 집안 운운하며 반드시 둘이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수진의 내면에는 어떤 불안이 존재하는 걸까. 엄마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어쩌면 수진에게는 편모 가정에서 자라면서 소위 ‘아빠 없는 아이’로 인해 겪어야만 했던 설움이 있는 게 아닐까.


영화는 수진이 편모 가정에서 자라면서 겪었던 일이나 그에 따른 소회를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가설이다. 수진은 편모 가정에서 자라면서 ‘아빠 없는 아이’라는 내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로 구성된 가족 모델을 삶의 ‘완성형’으로 여기게 된 것은 아닐까. 이 가설대로라면 수진이 현수의 격리를 기필코 막아서는 것은 현수를 위해서가 아니다. 만약 밖에서 자다가 무슨 일이 생겨 현수가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아빠 없는 아이’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아이 아닌가. 그렇다면 수진이 현수를 나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두 사람이 부부라서가 아니라 아이가 ‘아빠 없는 아이’로 자라는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요컨대 어떤 경우에도 ‘완성형’ 가족을 유지하고 싶다. 이것이 수진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상처를 입는 이유는 다 제각각이다. 편모 가정은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지만 수진에게는 어른이 되어서도 극복하지 못한 상처일 수도 있다. 정말 그렇다면 수진의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아마도 이 상처를 극복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이미 어른이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시간은 지나가 버렸다. 이제와서 ‘아빠 없는 아이’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사라진 아버지를 데려올 수도 없고 설령 데려온들 그 상처가 치유될 리도 만무하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한다. 아이는 물론 개별적인 존재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가 도저히 ‘타인’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말과 행동에서 유년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커가는 과정에서 인생을 다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부모는 얼마나 많은가. 수진 역시 그렇다면 아이에게서 자신의 유년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딸아이이고 아빠가 정체불명의 이유로 집을 나갈 수도 있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까지 똑같다. 수진에게 현수의 격리는 아빠의 상실을 연상시켰을 것이고 모녀만 덩그러니 남은 집은 구원 불가능성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이쯤되면 수진이 왜 이렇게 필사적인지도 이해가 된다.


수진에게 현수와 함께 아이를 잘 키우는 일은 단지 가정을 책임지는 일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구원이기도 한 셈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수진은 왜 편모 가정이 상처가 되었을까. 애비 없이도 잘 키웠다는 엄마의 말처럼 아빠의 부재가 직접적인 결핍을 유발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엄마의 입성이나 거주하는 집의 규모로 보아도 경제적인 문제는 아니다. 모녀 간의 사이도 좋아보인다. 다만 수진이 엄마에게서 생리적일 정도로 혐오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무속이다. “의학적으로 치료 안 되면 신적으로 치료받아야 돼”라는 말처럼 무속에 대한 엄마의 지지는 절대적이다. 


현대 사회에서 무속의 지위는 종교나 기복신앙의 일환이라기보다는 심리 치료의 한 형태로 여겨진다. 수진의 엄마가 무속에 경도된 경위는 나타나지 않지만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어린 수진의 눈에는 이것이 ‘아버지의 부재’에 기인한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누구나 등 기댈 곳이 필요한 법 아닌가. 어린 수진에게 무속은 아빠를 대신해서 엄마가 기대고 있는 등처럼 보였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비록 그것이 심리 치료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속이란 기본적으로 토속신을 모시는 주술적 행위이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신’이다. 이것은 저울추가 평행한 치환인가. 만약 그렇다면 아버지란 가정 내에서 신적인 존재였다는 말이 된다.


정리하면 이런 말이다. 가정의 신이 집을 나가버렸으므로 새로운 신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 아버지가 단순히 가족 구성원이 아니라 가정의 신인 문화를 우리는 ‘가부장제’라고 부른다. 이 가부장제 아래서 편모 가정은 당연히 불완전해진다. 그렇다면 수진이 편모 가정으로부터 받은 유년의 상처는 가부장제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편모 가정을 불완전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더라면 수진이 유년의 상처를 받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가정대로라면 수진이 어떻게든 현수를 격리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가부장제를 존속시키는 일이 된다.


가부장제로 인해 상처받은 수진이 가부장제를 존속시키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아이러니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친숙한 것이다.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이 자기 아이를 학대하거나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던 사람이 가해자가 되는 일과 비슷하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균형이 무너진 사회 구조를 내재적으로 흡수해버린 경우 본인이 아무리 똑바로 서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가령 가해자와 피해자만이 존재하는 구조가 한 번 입력되면 피해자로서의 삶이 아니라면 가해자로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구조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구원은 요원하다.


수진의 경우도 비슷하다. 2020년대 한국에서 무슨 가부장제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아랫집 할아버지는 현수가 있을 때보다 현수가 없을 때 더 많이 수진을 찾아왔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음담패설이 섞인 질책을 하는 모습은 수진으로 하여금 ‘남자 없는 여자’로서의 자신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고 나아가 편모 가정의 상처를 자극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 하의 편모 가정에서 자란 수진에게 이 사회는 여전히 가부장제 속에 있다. 그러나 이 말이 2020년대 한국 사회는 여전히 가부장제 하에 있다는 말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가부장제 하에서 상처를 받고 자란 수진은 본인의 의지와 반대로 가부장제라는 구조를 이미 내재화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수진에게 가부장제는 현실이 아니라 ‘트라우마’다.


현수의 격리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모습이나 아랫집의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자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이 트라우마에 기인한다. 가부장제에 대한 트라우마가 없는 아랫집 여자는 이혼을 대수롭지 않게 얘기할 수 있지만 수진은 아니다. 가부장제에 대한 상처가 낫지 않았다는 말은 가부장제라는 제도가 내면에 체화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랫집 여자와 달리 수진의 눈에 이 사회는 가부장제 트라우마의 필터를 거쳐서 재현된다. 그러니 남편의 격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수용할 수 없고 이혼 얘기만 나오면 상대를 경멸하는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가부장제 하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가부장이 필요하다는 역설이다.


가장 혐오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가장 혐오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역설은 수진을 끝내 광기로 몰아간다. 영화 말미에 집안을 온통 부적으로 도배한 수진의 모습은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되어버린 여자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현수의 증상을 의학이 아니라 신적인 것으로 믿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괴물은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현수와 격리하지 않고 동거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잉태되어 서서히 자라온 것이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미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쳐가는 여자의 이야기가 아닌가. 현수의 증상은 얼핏 현수를 괴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괴물이 되는 것은 수진이다. 요컨대 현수가 처음에 말했던 ‘누구’는 현수가 아니라 수진에게 들어온 것이다. 아니, 깨어난 것이다.


현수는 의식이 있을 때는 세상 누구보다 다정하고 친절한 남편이지만 무의식에 들어가면 피아를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파괴하는 괴물로 변한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은 이 증상이 수진을 괴물로 만들어가는 이유는 남편과 괴물이라는 이 기형적 조합이 가부장제의 구조와 닮았기 때문이다. 수진이 현수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이유는 누차 말한 것과 같이 가부장제에 의한 상처를 가부장제로 치유하기 위함인데, 이것은 자신을 지키고 보호해 줄 남편과 함께 자신을 상처 입힌 가부장제를 동시에 받아들이는 형태이다. 말하자면 수진이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려고 했던 완성형 가정은 바로 현수와 같이 상반된 이형의 성질이 결합된 존재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모델이 가부장제의 산물이라거나 현수의 내부에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던 가부장이라는 괴물이 숨어 살고 있었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영화의 1부와 2부가 보여주는 것은 수진의 관점이며 이 관점은 앞서 말한 것처럼 가부장제 트라우마로 인한 필터가 걸린 관점이다. 현수의 증상이 수진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고 해서 마치 그 원인이 현수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가족 모델 역시 마찬가지다. 현수의 증상은 말 그대로 증상이며 가족 모델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가족의 모습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것들이 기형적인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상처 입은 자의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처를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다. 현수의 관점으로 시작하는 3부에서 우리는 이제까지 일어났던 일련의 과정을 모두 본 다음임에도 불구하고 수진에게서 섬뜩함을 느낀다. 이 섬뜩함은 현수와 달리 의식을 가진 채로 강아지를 죽이고 아랫집 여자를 살해하려고 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의식의 유무 때문이 아니라 행위 자체가 끔찍한 것이다. 말하자면 현수가 느낀 섬뜩함은 그보다 앞서 수진이 먼저 느꼈던 감정이다. 수진과 달리 가부장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지 않은 현수는 간단히 결별을 선언하지만 끝내 가지는 못한다. 수진의 행동을 광기가 아니라 증상으로 생각할 때 그것은 바로 자신이 이제까지 했던 행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쉽게 결별을 선언한 것과 다르게 수진은 끝까지 현수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수진이 현수와 떨어지지 않은 이유를 가부장제 트라우마로 해석하지만 거기에 배우자를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세상에 단일한 이유로 벌어지는 일 같은 건 없는 것이니까. 현수가 수진의 광기를 자신과 같은 증상으로 받아들였다면 배우자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 역시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현수가 한 행동이 빙의가 아니라 연기라고 믿는데, 만약 그렇다면 그 연기가 수진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기술이 아니라 진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도 아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 어쩌면 마지막에 수진이 평온하게 잠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마음이 전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가부장제라는 특정 상황에서 발생한 상처에 대해 한참을 얘기했지만 세상에는 그 상처 외에도 수많은 상처가 존재한다. 중요한 일은 어느 상처가 더 아픈가를 따지는 게 아니라 상처 입은 자를 이해하고 쉬게 해주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모두 포기하라고 이야기해도 끝까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는 마음과 상대를 위해 진심이 담긴 거짓말을 할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픈 사람이 아프다고 말하는 것은 낫고 싶다는 뜻이니까. 영화 <잠>은 잠들어야 할 시간에 잠들지 못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피로한 자들의 이야기다. 때론 필요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휴식이다.



2024년 4월 23일부터 2024년 5월 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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