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 생활을 접고 본가에 머무는 짧은 기간 동안의 에세이
4년만에 본가로 돌아왔다.
나는 졸업과 동시에 발령을 받았다. 교육청에서 인사 장학사님으로 부터 온 전화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밤 7시경에 친구들과 술을 먹고 있는 자리에 전화가 울리더니 다짜고짜 학교를 알려주셨다. 일부 동기들이 전화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었기에 마음의 준비는 어느 정도 한 상태였다.
‘부산 ~~인데 본가랑 머네요. 자취할 준비 하셔야 할 것 같아요~.’
부산 서부에서도 가장 끝쪽에 위치한 곳, 처음 듣는 지명인 곳에 발령이 났다. 지도앱을 열어 대중교통으로 가는 법을 찾아보는데 도보 10분, 지하철 40분, 버스 30분 정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주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차를 타고 발령 난 곳에 도착해 전세를 구했다. 절대 자취는 없을 거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무색하게 당신이 차를 타고 온 길이 너무 멀었기에 주저 없이 집을 구해주셨고 아주 감사하게도 그 집에서 나는 4년을 자취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는 학교를 이동해야 하는 주기를 맞는 해가 되었다. 4년간 눈덩이처럼 불어난 짐들을 빼내며 나는 본능적으로 다음 거처를 찾고 있다. 본가는 아닌 걸로.
대신 선택한 곳은 경기도였고 경기도에 파견교사를 신청하여 그 결과를 대기하고 있다. 다른 학교로 이동 준비를 하는 짧은 방학 기간 동안 본가에 머물기로 했다.
4년 만에 물질적 짐들과 잊고 있던 정신적 짐과 함께 본가로 돌아왔다.
다시 들어온 본가는 대학 때문에 일찌감치 집을 나간 동생덕에 빈 방이 생겼다. 시기상 내가 본가 근처로 발령을 받았으면 단독으로 내 방으로 4년 전부터 사용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실은 그 빈 방은 모두의 방이다. 그 방은 유일하게 에어컨과 난방이 둘 다 되는 방이기 때문에 우리 네 식구가 모이면 그 조그마한 공간에서 옹기종기 모여 저녁시간을 보냈다. 넉넉하지 못한 수입으로 허리띠를 졸라 사는 우리 가족에겐 그 방 사이즈정도 감당할 수 있는 전기세와 가스비가 나오는 것 같다. 오래된 건물 탓에 샤시도 똑바르지 못해 외풍도 심해 보일러를 켜도 따뜻하지 않다는 게 덧붙이는 설명정도이다. 그 덕분에 요즘 각자의 방에서 개인생활을 즐기는 가족들과는 달리 살을 부대끼며 80년대 단칸방에서 사생활 보호 없이 개방된 생활을 하는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장점 하나를 꼽자면 그 덕인지 그나마 다른 가족들에 비해 대화를 하며 살아간다는 점?
되돌아보면 내가 대학생 4학년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시절에도 한여름, 그 방에서 시원하게 공부를 하라고 책상을 넣어주셨다. 그리곤 책상 위에서 공부하는 나의 뒤로 같은 방에 있으면서 아빠, 엄마, 동생 셋이서 낮잠을 자거나 이야기를 하는 등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생활들을 했다. 실은 나는 그 방을 뛰쳐나와 근처 도서관에서 공부해 위인이 되진 못했다. 아무튼 이랬던 모두의 방이 이제 모두가 떠나 ‘나만의 방’ 이 되었다. 섣불리 공표하기엔 이른감이 있으나 일단 경기도 파견이 결정나기 전까진 내 자취방의 짐들이 방을 차지하고 있으니 내 방이다.
파견 결정이 나면 또 비어질 방이지만 잠시나마 내 방을 가지게 된 기쁨을 느끼고자 오늘 기록을 남겨본다. 오래도록 방이 비어져 있던지라 냉골이다. 그래서 엄마가 빨리 거실로 나오라고 하셨지만 꿋꿋이 이 방에 있겠다고 했다. 지켜내고 싶은 마음인가, 아니면 유년시절 제대로 된 내 방 하나 없던 서러움에 대한 반항일까,
‘몇 년 만에 이 집에 내 방이 생겼는데, 내가 이토록 원했던 건데…….’ 오늘은 아직 코끝이 시큰하니 내일은 방을 데워서 잠을 ‘내 방’에서 자야겠다.
본가로 돌아오고 방이 생겼는데도 짐은 왜 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