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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층 계단참

by 달빛소년

지방에 살던 시절의 일이다. 유명 백화점 뒤편에 낡은 복도식 아파트가 하나 있었고, 지금은 재건축으로 새 단지가 들어섰다. 몇 해 사이 좋지 않은 일들이 이어져 소문이 무성했고, 끝내 신혼부부가 생활고에 시달려 아이까지 해치고 자살하는 비극까지 있었다.


그 단지의 순찰과 문단속은 수위 아저씨 한 분이 맡았다. 내가 빵이나 우유를 건네면, 아저씨는 늘 “고생했다, 얼른 들어가라” 하며 현관문을 열어주곤 했다. 그날도 밤 11시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새벽녘까지 학원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공기는 이상하게 눅눅했고, 비가 올 듯한 기운이 골목마다 내려앉아 있었다.평소와 같은 시각에 단지에 들어섰는데, 엘리베이터에는 “점검 중”이라는 팻말이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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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위실 문에는 “순찰 중” 푯말. 평소와 달리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어 계단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다리가 유난히 무거웠다. 9층에서 숨이 가빠지고, 허벅지에 열이 올랐다.


10층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렸고, 규칙적이었다. 바닥에서 무엇인가를 끄는 마찰음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11층, 12층으로 올라갈수록 또렷해졌다. 13층에 닿자, 소리가 바로 위에서 났다. 비상구 문틈으로 금속성 냄새가 먼저 스며들었고, 그다음에 소리가 확실해졌다.


슥— 탁.

슥— 탁.

슥— 탁.


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푸른 비상등이 복도를 적셨다. 바리케이드 너머, 엘리베이터 문은 끝내 닫히지 못했다. 문턱에는 사람의 다리가 걸려 있었다. 수위 아저씨의 다리였다. 몸은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반쯤 들어가 있고, 머리는 복도 바닥에 기댄 채 의식을 잃은 듯했다.


그 다리를 들었다 내리는 존재가 있었다. 다섯, 여섯 살쯤의 꼬마처럼 보였다. 마른 팔, 힘쓰는 기색은 없었다. 두 겨드랑이에 아저씨 종아리를 끼운 채 올렸다 내렸다. 그때마다 바닥에서 탁 소리가 울렸다.


얼굴을 보자 숨이 막혔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까만 구멍뿐이었고, 입은 귀까지 찢어진 듯 길게 늘어나 있었다.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는데, 복도 전체가 속삭였다.


“같이—밀자—”

“같이—밀자—”

“같이—밀자—”


소리는 위치를 제멋대로 바꿨다. 왼편, 정면, 천장 위.

귀 속이 한 번 울렸다.

손금에 땀이 찼다.

무릎이 가볍게 떨렸다.
고무 냄새.

숨이 얇아졌다.

이성이 앞서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바리케이드를 쾅 하고 밀쳐 젖히며, 목이 허락하는 최대치로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과 거의 동시에 꼬마의 윤곽이 물 위의 잉크처럼 번지더니, 틈 사이로 말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아저씨의 다리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공기가 한 박자 늦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 아…”

오래 잠수했다가 수면 위로 오른 사람처럼, 아저씨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나는 달려가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넣어 엘리베이터 쪽에서 끌어냈다. 눈동자가 제 위치를 찾는 몇 초가 길게 늘어졌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아저씨가 내 손목을 잡았다.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주 낮게, 귀에만 닿을 만큼 작게 말했다.


“봤지.”

“…뭘요?”

“애…눈—”


시선은 엘리베이터 문틈에 박혀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떼게 했다.


“아저씨, 잠깐 계세요. 엄마, 아빠 데려 올게요.”


복도 끝 전면 거울에 내 그림자가 둘로 겹쳐 비쳤다가 하나로 붙는 것이 스쳤다. 둘 중 하나가 반 박자 빨랐다. 보지 않은 것으로 치고, 나는 집에가서 엄마, 아빠를 깨웠다. 그때 엘리베이터는 다시 작동하는 듯했지만, 더더욱 타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빠는 관리실에 연락했다. 십여 분 뒤 관리사무소 당직자가 올라왔다. 당직자는 119와 엘리베이터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그 사이 아저씨는 완전히 의식을 회복했다.


“넘어지신 거죠?” 관리실 당직자가 물었다. 아저씨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내 쪽을 힐끗 본 뒤, 사람들 앞이라서였는지 짧게만 말했다.


“꼬마가… 들고 있었어.”


복도 공기가 순식간에 식었다.


“이 시간에 애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 나왔고, “피곤해서 헛것을 본 것 아니냐”는 말도 뒤따랐다.

아저씨는 같은 말을 조금 더 다듬어 덧붙였다.


“눈이— 없더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점검판의 붉은 LED는 14에서 계속 깜빡였다. 업체 기술자는 “전원을 꺼놨는데 왜 표시가 뜨지?” 하며 배선을 만지작거렸다.


그다음 며칠 동안, 새벽만 되면 엘리베이터는 ‘점검 중’인데도 14층 정지 표시를 띄웠다. 계단참에서는 젖은 발바닥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위아래로 오갔다. 회로나 센서라는 설명은 문을 닫아 주지 못했다.


아파트는 몇 해 뒤 재건축에 들어갔고, 지금은 반짝이는 신축으로 갈아입었다. 가끔 그 근처를 지날 때 로비 유리벽에 비치는 디스플레이 숫자를 보면, 실제 층표시는 13 다음이 15로 건너뛰는데도 유리에는 잠깐 14가 스치듯 켜졌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착각일지 모른다. 다만 그 스침 뒤에는 늘 소리는 없는데 웃음의 모양만 혀끝에 남는다.


그날 이후, 아저씨는 내가 늦게 들어가면 꼭 계단참 끝까지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늘 같은 말을 남겼다.


“늦으면 계단으로 와. 엘리베이터는… 애가 좋아해.”


지금도 새벽에 14층 표시가 떠오르면, 나는 주저 없이 계단을 택한다. 규칙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규칙. 그 규칙을 지키면 우리는 겨우겨우 각자의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다.


누구는 복도에, 누구는 집 안에. 그리고 어떤 하나는—항상 그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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