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났을 때 그애는 스무 살, 나는 스물여섯이었다. 편의점 야간 알바로 주 3회 같이 서다가, 새벽 정산이 끝나면 컵라면 뚜껑을 나란히 덮어놓고 김이 가라앉는 속도를 멍하니 보곤 했다.
이름은 연아. 말수가 적고, 영수증을 모아 반듯하게 접는 습관이 있었다. 종종 내 몫의 자투리 도시락을 챙겨주며 “언니는 밥을 빨리 먹더라” 같은 말만 툭 던졌다.
공장으로 먼저 옮긴 건 연아였다. 내가 퇴근길에 역 앞에서 만나면, 그애는 늘 내 쪽으로 가볍게 뛰어왔다. 어느 날부터 그애가 말했다.
“언니, 공장 기숙사 아래층에 도윤이라는 사람이 나를 미워해.”
도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층이 다르면 안 마주치겠지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구내식당이 1층이라 식사 때마다 스친다는 거였다. 그애는 밥숟가락을 들기 전, 쪽지를 꺼내 펼쳐 보였다. ‘내려온다’, ‘전화 받아’, ‘쟤 또 왔다’. 삐뚤빼뚤한 필체. “내 앞에서 이 말들을 해.” 연아가 손톱으로 밑줄 긋듯 종이를 문질렀다.
며칠 뒤, 퇴근길에 방문증을 받아 구내식당에 들어갔다. 식판을 들고 줄을 서는데, 배식대 뒤편에서 목소리가 날았다.
“도윤 씨, 쌀 떨어졌어요! 남자분 쌀포대 좀—”
흰 모자 쓴 아주머니가 우리 쪽을 힐끗 보더니 “아, 저기요… 아, 아니에요” 하고 혼잣말처럼 고개를 숙였다.
연아는 식판 모서리를 더 꽉 쥐었다. 손바닥에 자국이 남았다.
그날 저녁, 기숙사 엘리베이터 앞 게시판에 A4 공지가 붙었다.
배수관 소음 민원 안내 — 2층 205호 / 1층 수압 조절로 야간 소음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인쇄가 흐릿했고, 아래쪽 경비실 직인이 잉크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연아는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봐, 있지?”
다음 날 같은 자리를 지나가니 공지가 사라져 있었다. 대신 ‘쓰레기 분리수거 철저’ 안내문만 깔끔하게 붙어 있었다. 경비실에 내려가 물었더니 경비 아저씨가 고개를 저었다.
“205호 빈 방이에요. 도윤? 그런 분 없는데요.”
한 달쯤 뒤, 연아가 내 원룸에 하룻밤 자고 가겠다고 했다. 같은 층 아주머니들이 싫어한다고, 장난처럼 말하면서. 나는 대수롭지 않게 이불을 더 깔았다.
창문 바깥에선 오토바이 소리가 잠깐 났고, 1층 호프집에서 노래가 흘렀다. 우리는 치즈 얹은 라면을 먹고, TV 소리를 줄인 채 각자 휴대폰을 만졌다. 자정 무렵, 연아가 내 어깨를 톡 건드렸다.
“언니, 들려?”
“뭐가?”
“위에서. 윗집에서 내 욕하는 소리.”
나는 잠깐 귀를 기울였다. 7층이었다. 위아래로 가벼운 발소리. 수도 배관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는 ‘웅—’ 같은 울림. “그 정도는 나지.” 대충 웃으며 넘기자, 연아가 거실 천장 환풍구 아래로 가 섰다. 목을 빳빳이 세우고 금속 타공판을 올려다봤다.
“지금 말했어. ‘얘 또 내려왔다’고. 웃었어.”
나는 싱크대 서랍을 열었다. 식도, 과도, 깨진 손잡이 가위를 하나씩 꺼내 수건으로 감쌌다. 플라스틱 도마를 들어 올릴 때 손끝이 흔들렸다.
“언니 그거… 왜 숨겨?”
“내가 잘못 들을까 봐. 내 귀를 잠깐 치워두는 거야.”
칼들은 서랍 맨 뒤칸으로 들어갔다. 새벽 세 시가 넘어가자 자동차 시동 소리들이 순서대로 사라졌다.
그때, 말이 아닌 말의 찌꺼기가 올라왔다. 환풍구 타공 사이로 굴러떨어진 자음 몇 개.
“—려왔— …끊어.”
나는 숨을 멈추고, 다시 들이켰다. 연아는 창가 유리에 이마를 붙였다. 아래는 비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연아가 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통째에 받았다.
“반장님, 그… 도윤 씨 때문에— 네. 네, 그분이요.”
한참 뒤 들어온 연아가 신발을 벗다 말고 말했다.
“언니. 도윤이 없대.”
“뭐가?”
“우리 층에도, 아래층에도… 아예 그런 사람 없대.”
웃으려다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단단하다고 믿었던 바닥 밑이 텅 빈 느낌. 나는 서랍을 열어, 감아둔 수건을 더 안쪽으로 밀었다.
며칠 뒤, 연아가 사내 포털 캡처 화면을 보냈다.
〈외부 용역 출입기록 — D.Yoon / 202–01F / 12:01–12:37〉
초점이 흐렸다. 반장은 “그건 지난달 테스트 데이터예요. 실명이 아니라 예시로 넣은 거”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에서는 ‘도-윤’이 미끄러졌다.
그 무렵부터였다. 출근길 버스 광고판에 도윤치과가 보였다. 점심 먹으러 간 골목에는 도윤분식 간판이 매달려 있었다. SNS에서 우연히 본 결혼 사진 속 신랑 태그가 doyoon_k였다. 그 이름이 어디에나 붙어 있었다.
하루 지나 다시 그 자리로 가보면 치과는 도연이었고, 분식집도 도연분식이었다. 사진을 찍어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집에 와서야 깨달았다. ‘방금’ 본 것들인데, 증거는 늘 한 박자 비었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다. 1층에서 닫힘 버튼이 먹지 않아 서 있었다. 층표시가 ‘B1’에서 ‘1’로 바뀌는 순간, 빨간 LED가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 ‘DY’로 깨졌다가 다시 ‘1’로 돌아왔다. 손이 자동으로 휴대폰을 더듬었지만, 화면을 켰을 때는 평범한 ‘1’이었다. 나는 거울 속 내 눈을 보았다. 나는 이미 그 이름을 찾고 있었다.
그날 오후, 연아 손을 잡고 근처 병원으로 갔다. 대기실에서 같은 양식의 설문지를 나눠 들었다. ‘최근 한 달 간 들리지 않아야 할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연아는 칸을 오래 보고, 조용히 체크했다.
의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기에는 약이 잘 듣습니다. 그리고… 곁에 누가 있는지가 중요해요.”
내가 더듬었다.
“저는 요즘 ‘도윤’이란 이름이 자꾸 눈에 띄어요. 실제보다 자주 보이는 느낌… 이것도—”
“그럴 수 있어요.” 의사가 답했다. “주의 편향, 흔히 빈발 착시라고 하죠. 마음이 어떤 대상에 묶이면, 관련 자극이 과장되어 들어옵니다. 실제로 본 것도, ‘보았다고 확신한 기억’도 같이 남아요. 중요한 건, 그 확신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습관이에요.”
나는 연아를 봤다. 그애는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말없이 라면을 끓여 먹었다. 국물 김이 그릇 위에 얇게 깔렸다가 사라졌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이건 병의 그림자일 수 있다. 그리고 내 눈에도 비슷한 그림자가 진다. 그림자를 친구처럼 대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몇 주가 흘렀다. 연아는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가끔 알약을 손에 쥐고 멍하니 있으면, 내가 물컵을 가져다줬다. 공장 일은 잠깐 쉬었다. 그애는 내 원룸에 가끔 와서, 책상 위 영수증을 다시 접었다. 우리는 말이 적었다. 대신, 세계를 조금씩 회복하는 침묵을 같이 앉아 견뎠다.
비 오던 날, 편의점 유리문이 열리고 공장 반장이 들어왔다. “그 친구 잘 지내요? 이름이… 연아였죠? 하여튼 우리 명단엔 도윤이란 직원은 없었어요. 예전에 용역이 한 번 바뀌긴 했는데.”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계산대 옆 전단지 꽂이에서 종이를 꺼내다가, 투명 테이프에 붙은 작은 메모를 봤다.
‘도윤 — 1F 배수’
사장은 “아, 그거 지난달 배관 기사님 거예요” 하고 툭 떼어 버렸다.
테이프 끈적임이 카운터에 희미하게 남았다. 점착 흔적은, 원래 있던 것보다 오래 남는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설거지를 하다 물을 잠그고 섰다. 환풍구 아래. 전등 불빛이 타공 구멍마다 박혀 있었다. 그 사이로 아주 얇게 사람 숨 같은 기류가 드나드는 느낌이 들었다. 말은 아니었다. 말이 되기 직전의 공기였다.
나는 서랍을 열고 칼이 있는 맨 뒤칸에 손을 넣었다가, 대신 고무장갑을 꺼냈다. 장갑 안쪽 분말 냄새가 났다. 장갑을 씌우며 생각했다. 병을 이해한다는 건, 설명이 아니라 습관을 바꾸는 일이라고.
가을에 들어서 연아는 다른 공장에 새로 들어갔다. 근무표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다. 이름들이 세로로 쭉 적혀 있었다. 맨 아래줄에 ‘연아’, 그 위에 낯선 이름들이 몇 개. 화면을 확대하니 가운데쯤 흐릿한 연필자국이 있었다. 지웠다 남은 것처럼. ‘도…’까지만 겨우 읽혔다.
“초안이라 그럴 거야.” 내가 말하자 연아가 웃었다.
주말, 우리 우편함에 얇은 전단지가 끼워져 있었다. 〈배수관 역류 점검 안내〉. 어디서나 보는 종이. 오른쪽 하단에 볼펜으로 꾹 눌러 쓴 손글씨가 있었다.
‘상담: 도윤 010-…’
마지막 네 자리는 문질러져 사라져 있었다. 종이를 반으로 접어 우편함 안쪽에 다시 밀어 넣었다. 다음 날 퇴근하며 꺼내보니, 손글씨가 사라져 있었다. 인쇄만 남아 있었다. 같은 종이인데, 아닌 종이처럼. 나는 그 전단지를 그대로 쓰레기통에 넣었다.
연아는 많이 나아졌다. 처음엔 밤마다 메시지를 보냈다. ‘언니, 오늘은 조용했어요’, ‘환풍구가 쉬는 날 같았어요.’ 점점 줄어들었다. 영화관에서 팝콘을 엎지른 날, 우리가 앉은 줄 아래로 ‘웅—’ 하고 초저음이 흘렀다. 서라운드의 일부였다. 연아는 귀를 막지 않았다. 나는 그 옆얼굴을 오래 봤다.
잠들기 직전, 위층에서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늦은 시간이었고, 바닥은 얇았다. 환풍구가 아주 작게 울었다. 나는 자동으로 부엌 쪽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었다. 손은 칼자루를 찾지 않았다. 장갑을 꺼내 다시 넣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어 연아에게 ‘잘 자’라고 보냈다. 곧 답이 왔다.
— 언니, 내일도 조용하게. 그 말이 좋았다. 내일도 조용하게. 나는 불을 끄고, 칼이 있는 서랍을 한 번 더 밀었다. 맨 뒤칸은 여전히 뒤에 있었다.
그때 아주 작게—정말 아주 작게—환풍구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났다. 말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내 귀를 수건처럼 접어 마음속 맨 뒤칸에 넣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 없음.
— 내일 배수 보러 1층 내려가요. 문 열어둬요.
손바닥을 지나가는 서늘함이 짧게 스쳤다. 나는 답장을 쓰다 지웠다. 화면이 꺼지며 천장의 타공 구멍들이 다시 어둠이 됐다. 그때 인터폰이 한 번, 아주 짧게 ‘띵’ 하고 울렸다. 흔한 소리. 어디서나 나는 소리. 그래도 나는 불을 다시 켰다. 싱크대에서 물이 한 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컵 안을 정확히 맞혔다.
공포는 없어지는 게 아니라 자리를 옮긴다. 환풍구 아래에서 서랍 맨 뒤칸으로, 그리고 내 손의 습관들로.
나는 마음속에서 천천히, 또박또박 되뇌었다.
조용하게.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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