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 펜을 본 건 중3 겨울이었다.
교복을 맞추고 나오다, 새 학기 기분을 내보려고 문방구 앞 좌판에 멈췄다. 형광펜, 지워지는 볼펜, 샤프심들 사이에 붉은 만년필 하나가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었다.
“얼마예요?” 하고 집으려는데, 아저씨가 손등으로 가만 막았다.
“그건 돈으로 파는 게 아냐. 빨간색으로—특히 남의 이름을—쓰지 마. 받은 만큼, 내놔야 해.”
“에이, 미신이죠.”
이상하게 아저씨는 그 펜을 계산하지 않았다. 나는 웃으면서도 펜을 받아 가방에 넣었다.
그날 밤, 시험공부하다 심심풀이로 우리 강아지 ‘뽀삐’ 이름을 몇 번 썼다. 잉크가 종이 밑살로 미지근하게 스며들며 피부를 스치는 듯했다. 손에 닿는 촉감도 너무 좋았다. 밤늦게까지 문제집을 풀고 불을 끄자, 거실에서 발톱 긁는 소리가 한 번 나고 조용해졌다.
알람이 울리기 전, 새벽 어스름에 물그릇을 채우려고 나가 보니 뽀삐가 카펫 모서리에 옆으로 누워 있었다. 코끝은 아직 미지근했고 눈꺼풀은 반쯤 감겨 있었다. 배에 손을 대니 아주 얇게 오르내리던 숨이 찰나처럼 멎었다. 이름을 부르며 등을 쓸어도 반사처럼 떨던 꼬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소파 밑에서 담요를 꺼내 덮어 주고, 주방에 가서 컵을 씻다 말고 한참 울었다. 아침이 밝을 때쯤, 세면대 위에 고개를 숙이자 코피 한 줄이 물에 번졌다.
섬뜩한 느낌이 났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좋은 펜이었다. 그러나 좋다는 감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몇 번 더 쓰고는 서랍 맨 뒤칸에 가려 버렸다.
고등학교, 그리고 같은 대학. 미나와 나는 오래된 친구였다. 나는 늘 미나 옆의 두 번째 자리에 익숙했다. 같이 입은 교복도, 같은 학원도, 같은 대학 강의실도 어쩐지 미나를 가운데로 돌았다.
이때 나는 여드름을 가리고 교정 와이어에 입 안이 자꾸 긁히던 시절이었다. 미나는 반대였다.
강의실 문이 열리면 누가 먼저 손을 흔들었고, 빈자리가 나면 “여기!” 하고 미리 맡아 둔 자리로 누군가를 불러 앉혔다. 조교가 출석을 부르다 한 번쯤 “미나야, 지난번 도와줘서 고마워. 같이 밥 먹자” 하고 넘어가고, 팀플이 잡히면 자연스럽게 조장이 됐다. 발표가 끝나면 교수도, 뒤줄의 모르는 학생도 박수를 크게 쳤다.
미나는 치어리더 활동을 했다. 점심시간 동아리방 앞은 늘 미나 주변이 먼저 북적였다. “언니, 이거 드세요” 하고 후배가 빵을 건네고, 축제 주점 방명록에는 미나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단톡방에서 누가 일정 정리 좀 해달라 하면 “제가요!” 하고 스티커가 연달아 붙었고, 공지를 올리면 읽음 수가 금방 ‘모두 읽음’으로 바뀌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도 인기가 남달랐다.
나는 그 장면들을 늘 한 박자 떨어져서 보았다. 복도 창가에 기대 종이컵 물을 홀짝이면서, 혀끝이 와이어에 스칠 때마다 말을 덜 하게 됐다. 미나에게는 사람들이 먼저 다가갔다. 미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미나에 대한 걸 많이 물었다.
1학년 봄, 나는 승우를 좋아하게 됐다. 칠판을 베껴 적을 때 단정하게 내려앉는 획, 마침표를 찍을 때만 아주 조용히 떨리던 손끝을 오래 보게 됐다. 나는 복도 창가에 기댄 채 종이컵 물을 홀짝이며, 먼저 던질 말을 마음속에서만 연습했다. 미나가 웃을 때, 주변의 공기가 한 톤 밝아지는 기분이 있었고, 그 밝음은 늘 내 자리까지는 닿지 않는 듯했다. 미나는 승우에게 쉽게 다가갔다.
그러다 어느 저녁, 단톡방에 한 줄이 떴다.
— 우리 사귀어요. 오늘부터 1일
프사 속에서 미나와 승우가 다정하게 붙어 서 있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내렸다. 엄지에 땀이 배었다. 그때 문득, 서랍 맨 뒤칸의 금속 감촉이 손끝으로 떠올랐다. 화가 났다. 아니, 그건 질투였다. 붉은 만년필. 금속 몸통에 잔 흠집이 옅게 빛났다.
다이어리를 펴고, 미나의 본명을 적었다.
박미나.
한 번 더.
박미나. 박미나. 박미나.
펜촉은 종이를 긁지 않았다. 분명 종이에 쓰는데, 동물의 가죽에 쓰듯 살을 스치듯 지나갔다. 손끝이 따뜻해졌다.
몇 날, 미나는 멀쩡했다. 일주일째 되던 날, 고열과 흉통이 찾아왔다. 팔과 가슴에 붉은 반점이 올랐다. 가까이 보면 획 방향이 있었다. 어젯밤 내가 밟아 쓴 선처럼 길고 얇았다.
무서웠다. 그런데 가슴 아주 깊은 어딘가에서 가벼운 기쁨이, 부끄럽게 올라왔다. 미나가 결석하는 동안 승우는 나에게 더 자주 연락했다. “미나 괜찮지? 힘들면 말해.” 나는 “미나가 아파서… 마음이 좀 그렇다”라고 답했다. 욕심이, 합리화보다 반발짝 앞섰다.
밤, 원룸 화장실. 변기뚜껑을 닫아 작은 책상을 만들고 다이어리를 올렸다. 다시 펜을 들었다.
박미나. 박미—
그때 펜이 덜컥했다. 잉크가 한순간 굳이 붙는 느낌. 펜촉 끝에서 마른 숨이 새었다. 종이에 파인 자국은 있는데 붉음이 따라오지 않았다. 더 눌렀다. 칙— 하고 금속 긁히는 소리만 났다.
거울을 봤다. 뒷목 얕은 실핏줄이 낯선 각도로 가늘게 떠 있었다. 방금 전 펜촉의 각도와 비슷했다.
다음 날, 미나는 입원했다. 열은 밤에 잠깐 떨어졌다가 오전이면 다시 올랐다. 수술 얘기가 오갔다. 병실 창턱에 귤을 올려두고 껍질로 ‘미’ ‘나’를 만들었다가 허겁지겁 치웠다. 복도 끝 안내판의 빨간 불빛이, 어디선가 본 잉크의 호흡처럼 느리게 커졌다 작아졌다.
목요일 밤, 승우가 내게 기대었다. “우린… 너무 미안하지 않게 만나자.”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이 잠깐 왔다. 곧바로 죄책감이 질문처럼 따라왔다. 끝내야 할까. 빨리 끝내 주는 게 착한 걸까.
다시 욕실로. 수건, 공책, 펜. 펜촉을 내렸다.
이번엔 아예 잉크가 나오지 않았다. 종이 위에 희멀건 물자국만 번졌다. 코피가 흘렀다. 무심코 손가락으로 닦았다가, 그 피가 종이에 붉은 획을 대신 그려 넣는 걸 보았다.
그제야 알았다. 이 펜은 잉크가 마르면, 쓴 사람의 피를 가져간다.
거울 속 뒷목의 잔금이 또렷해졌다. 늑골 사이로 뜨거운 것이 비집고 들어왔다. 펜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쥐었다. 손바닥 열이 식지 않았다.
미나는 상태가 나빠져 수술을 앞두었다. 그 사이, 승우와 나는 밤을 함께 보냈다. 스탠드 불빛 아래 피부가 닿는 자리마다 차갑고 고른 선이 같은 속도로 내려앉았다. 승우의 뒷목에도 아주 얕은 잔금이 떠 있었다. 나는 불을 끄고 욕실로 들어갔다. 마지막 획. 그 한 줄만 더.
펜촉은 바싹 마른 혀처럼 종이를 핥았다. 손가락 끝을 살짝 찔러 작은 피를 꺼내 획을 이었다. 그 순간, 가슴 안쪽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조여들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누군가 내 안쪽에서 한 줄씩 지워가는 느낌. 종이 위 ‘박—’에서 손이 멈췄다.
아침, 미나의 열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왔다. 수술은 연기. 반점은 희미해졌다. 다이어리에 써둔 미나의 이름 몇 개가 사라져 있었다. 남은 획들의 방향도 어제와 달랐다. 마치 밤사이 누군가 글씨 쓰는 손을 바꿔 적어 놓은 것처럼.
우리는 함께 병문안을 가기로 했다. 미나가 회복하면 승우랑 연인이 되었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오후 네 시 반, 교차로에 서자 신호등의 흰 사람이 세 번 깜빡였다. 세 번 중 한 번은 반 박자 빠르게 꺼졌다. 시야 가장자리가 아주 천천히 좁아졌다. 숨을 들이쉬면 늑골 사이가 안쪽으로 잡아당겨졌다—종이를 아래서 잡아 빼는 듯.
가방에서 펜을 꺼내 하수구로 던졌다. 금속이 철판을 스칠 때의 소리가 가슴 안에서도 똑같이 났다. 칙—. 발끝이 흰 칸 밖으로 반마디 밀렸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오늘은 피가 아니라— 나였다.
그다음엔 트럭의 그림자, 그리고 눌림.
여름이 지나고, 미나는 회복했다. 긴 머리를 잘라 어깨에서 말리고, 퇴원 직후 사진을 올렸다. “이제 괜찮아요.” 승우는 그 옆에서 어색하게 엄지를 들었다. 몇 달 뒤 청첩장이 왔다. 크림색종이에 검은 잉크로만 인쇄된 글씨. 붉은 잉크는 한 줄도 없었다.
예식장, 흰 장갑들이 의자 줄을 정리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정시에 맞춰 닫혔다. 그때 미나는 본능적으로 뒷목을 만졌다. 머리카락 굵기의 아주 얕은 균열이 손끝에 잡혔다. 미지근한 온기가 한 번 올라왔다가 곧 가라앉았다. 오래전 누군가 종이 밑살을 긁어 만든 흠집을 닮은, 거의 보이지 않는 잔금.
밤, 신혼집 부엌 어딘가에서 서랍이 아주 조금 열렸다가 닫혔다. 불은 켜지지 않았다. 말도 없었다. 다만 어디선가 붉은 선 하나가 보이지 않는 종이 위를 아주 천천히 건너갔다.
‘한지원’
그 무렵, 문방구 앞 좌판이 다시 열렸다. 향내가 얕게 흘렀다.
아저씨는 낡은 장부의 날짜 칸에 붉은 줄 하나를 곧게 그었다. 이름은 비어 있고, 획만 남았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그 한 줄이 아주 얕게 번졌다가 금세 말랐다. 펜꽂이는 비어 있었다.
— 구매자: 한지원 / 지불: 완료
언젠가 또 누가 묻겠지. “얼마예요?” 하고. 그때도 주인은 똑같이 말할 것이다.
“그건 돈으로 파는 게 아냐. 빨간색으로—특히 남의 이름을—쓰지 마.”
그 밤, 미나는 잠결에 꿈을 꾸었다. 종이 아래로 미지근하게 스며드는 붉은색. 지원이 자기 이름을 끝까지 쓰려다 멈추는 꿈. 깨어 보니 아무도 없었다.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손바닥의 잔열이 한동안 분명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길고 고른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승우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붉은 이름은 살아 있는 것을 닳게 한다.
그리고 닳아 없어진 자리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검은 글씨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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