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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정류장

by 달빛소년


시골 버스 정류장엔 불이 하나뿐이다.

투명 아크릴 바람막이는 긁힌 자국이 거미줄처럼 번졌고,

녹슨 파이프 기둥은 물때가 초록빛으로 올랐다.


비닐 차양 끝에서 빗물이 “도도도—” 무릎 높이로 떨어지고,

플라스틱 벤치엔 벗겨진 농협 광고가 하얗게 일어났다.

전봇대 변압기가 낮게 웅— 하고 숨 쉬고,

논두렁 배수로에 고인 물은 젖은 짚 냄새를 밀어 올린다.


마을 안내도는 비에 번져 강아지풀처럼 퍼졌고,

막차 시간표의 숫자는 검은 얼룩만 남았다.



지직—지직—. 벌레가 날개를 털며 전등을 친다.

트럭 하나가 휙 지나가고, 다시 고요.


그때, 비닐 지퍼를 여닫는 소리가 났다.

지—잇, 지—잇.


“저기요.”


나는 고개를 든다.

빛의 테두리, 어둠과 맞닿은 선 위에 여자가 서 있다.


머리를 단정히 묶었고, 원피스는 깨끗하다. 향수 냄새가 얇게 스친다.

…그런데 신발은 흙탕물에 젖지 않았다. 비가 오는데.


“혹시… 핸드백 못 보셨어요?”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하려고 입을 뗀다.


“아—”


툭.


무릎을 살짝 치는 손. 마른 손가락, 작은 손등.

회색 카디건의 동네 할머니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된장과 파 냄새가 따뜻하게 온다.

할머니가 내 앞을 가로막듯 한 발 내딛고,

내 대신 먼저 말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게 아니여. 잃어버린 데다 갖다 놔.”


여자는 미소 짓는다.

입만 웃고, 소리는 없다.

향수 뒤로 젖은 동전 같은 금속 냄새가 아주 얇게 섞인다.


“저기… 거기까지만 같이 가주시면—”


“네—”가 목구멍에 걸려 올라오자,

할머니가 팔을 꾹 쥔다. 손톱이 살에 닿는다.


이빨 사이로 새는 목소리.

“대답 말아. 이름도 말지 마. 따라가지 마.”


여자가 한 걸음 들어온다.

전등 아래로 얼굴이 드러나는데, 눈동자는 또렷한데 동공이 작다.

빛을 만나도 크기가 변하지 않는다.


비는 계속 오는데 어깨에는 물방울 하나 없다.

여자 주변으로만 빗소리가 잠깐 멎은 듯 고요하다.


“길을 몰라서 그래요.”


입술이 먼저 움직이고, 소리는 반 박자 늦게 나온다.

입모양과 소리가 어긋난다.

할머니가 내 어깨를 뒤로 더 민다.

장바구니에서 마른 대파를 꺼내 바닥에 탁— 탁— 탁—.

그리고 또박또박.


“찾을 거면 혼자 가. 길은 왔던 길이여. 저기 있잖어—”

여자가 고개를 갸웃한다.

목근육을 쓰지 않는, 사진을 살짝 기울인 각도.


“같이—”


멀리서 헤드라이트가 둔탁하게 휘돈다.

불빛이 정류장을 훑고 지나갈 때,

여자의 발자국이 잠깐 번쩍— 비친다.


흙이 아니라, 웅덩이에 비친 전깃줄이 흔들리듯.

발자국이 네 개다.


사이사이에 하나씩 더— 사람 발과 뒤집힌 발처럼 겹쳐 있다.

버스가 가까워지며 쓱— 속도를 줄인다.

여자가 더 가까이 묻는다.


“핸드백, 못— 보— 셨— 어— 요?”

단어 사이마다 숨소리가 끼인다.

후—. 후—. 후—.


할머니가 내 귀에 바짝 속삭인다.

“눈 마주 보지 말고, 혓바닥 깨물고 있어.”

나는 혀끝을 세게 문다. 비릿한 쇠맛.

동전 냄새가 한층 진해진다.


버스가 선다. 에어브레이크 쉬익—.

문이 열리며 따뜻한 공기가 밀려온다.

여자가 손을 뻗는다.


손톱은 말끔하지만, 피부가 물에 오래 불었던 것처럼 희게 올라 있다.

할머니가 먼저 올라서 기사에게 성큼 묻는다.


“기사님, 막차지? 이 앤 윗동네여. 얼른 가요.”

그리고 내 팔을 잡아끌어올린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으려 애쓴다.

…그런데 유리문에 비친 그림자가 눈에 박힌다.


유리 속에는 나와 할머니, 그리고 여자가 함께 서 있다.

유리 바깥에는 우리 둘뿐인데.


여자는 유리 안에서만 입을 ‘아’ 하고 연 채 서 있다.

그 틈으로 물이 뚝— 떨어진다. 바닥은 마른데.

문이 닫힌다.


여자는 문틈을 막지 않는다. 대신 유리에 손바닥을 붙인다.

손자국이 “안쪽”에서 또렷이 남는다.

다섯 손가락… 아니, 네 개. 엄지가 없다.

버스가 움직이고 전등빛이 멀어진다.

그 순간, 여자의 입과 소리가 딱— 맞아 떨어진다.


“대답했으면—따라왔을 텐데.”

문틈이 완전히 닫히며 손자국이 쓸려 사라진다.


버스 불빛은 논길을 지나 산자락으로 꺾인다.

나는 자리에서 숨을 고른다.

심장은 “쿵—쿵—쿵—” 떨어져 나가듯 튄다.

할머니가 내 무릎에 종이휴지를 올려준다.


“입, 피난다.”

그제야 피맛을 삼킨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을 때,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벨 누른 기억도, 정차한 기억도 없다.

창밖, 금방 지나온 정류장이 멀어진다.

안내판 아래에 검은 물체가 매달려 흔들린다.

가로등 불빛에 반짝—. 핸드백 같다.


바람은 동쪽으로 부는데,

그건 바람을 거슬러 흔들린다. 마치 누가 들고 있는 듯이.

그날 이후, 정류장에서 누가 무엇을 잃어버렸냐고 물으면


나는 입을 꼭 다물고 혀끝을 살짝 문다.

쇠맛이 올라오면, 마음이 놓인다.

대답하지 않으면 된다.


가끔, 비 오는 밤이면

그 정류장 유리에 손자국이 네 개 찍힌다는 소문이 돈다.

엄지 없는 손바닥.


지워도 다음 날 다시 생기는 손바닥.

처음엔 향수 냄새가 나다가, 곧 젖은 동전 냄새로 바뀌는 그 정류장.

그 할머니는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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