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태도'가 불평등을 덮는 방식
누군가는 말했다.
“학벌, 집안, 재산, 부모의 능력, 사는 지역, 모두 이길 수 있는 건 태도 하나다.”
그럴듯하다. 인간의 평등을 믿고 싶을 때, 이 말은 이상한 위로가 된다.
하지만 그 문장이 SNS를 잠식할수록, 나는 불안해진다.
태도가 만능의 답이 되는 사회는 이미 구조의 불평등을 잊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노력과 성실, 예의와 겸손이 여전히 효력을 가진 사회라면,
태도는 마지막 남은 공정의 언어처럼 들린다.
그러나 태도만으로 모든 걸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현실을 잊는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태도보다 훨씬 거대한 벽들이 존재한다는 걸.
좋은 태도는 면접 자리에서 잠시 인상을 남길 수 있지만,
좋은 집안은 그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기회를 쌓아둔다.
서울 강남의 초등학교와 지방 중소도시의 초등학교는 이미 다른 세상이다.
누군가는 영어유치원과 코딩학원을 전전하며 자라고,
누군가는 부모가 맞벌이로 집에 없어 혼자 라면을 끓여 먹는다.
대학에 가서도 차이는 벌어진다.
누군가는 등록금 걱정 없이 교환학생을 다녀오고,
누군가는 학자금 대출로 신용불량을 걱정한다.
태도가 아니라, 자원이 다르다.
집안의 배경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선택의 폭’을 결정한다.
누군가는 “하고 싶은 일을 해”라는 말을 듣고,
누군가는 “일단 안정적인 직장부터 잡아야지”라는 말을 듣는다.
같은 나이, 같은 능력이라도 세상이 기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언제나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그 여유는 부모의 사회적 네트워크와 경제력에서 비롯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태도 하나면 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너지지 않을 환경 속에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사는 지역’조차 태도의 가능성을 결정한다.
서울에 사는 사람은 문화행사와 인턴십, 네트워킹의 기회를 지하철 한 번이면 잡을 수 있지만,
지방 청년은 통학 2시간에 하루가 녹는다.
이 불균형한 현실 속에서 “긍정적으로 살아라”, “태도만 바꾸면 된다”는 조언은
잔혹할 만큼 무책임한 말이다.
태도는 결코 출발선을 바꾸지 못한다.
단지 이미 가진 자들의 안정된 발판을 도덕적으로 합리화할 뿐이다.
착하게 굴어도 빚은 없어지지 않고, 성실하게 일해도 임금은 오르지 않는다.
공손하게 말해도 권력자는 듣지 않는다.
그런데도 SNS에서는 ‘태도 좋은 사람’이 도덕적 우월감처럼 소비된다.
마치 태도가 좋아야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말을 쓰는 사람은 이걸 알까?
SNS는 사람을 평가하는 공간이 아니라, 이미지를 거래하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좋은 태도’란 결국 문제 제기하지 않고,
불편한 말을 하지 않으며,
늘 “맞아요”, “공감해요”, “감사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건 성숙이 아니라, 복종이다.
물론 태도는 중요하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말 한마디와 눈빛 하나가 신뢰를 만든다.
하지만 태도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말은 위험하다.
그 말은 곧, “네가 실패한 건 태도가 나빠서야.”라는 새로운 낙인으로 이어진다.
실력이나 제도의 불합리, 사회적 차별 같은 것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오직 ‘너의 태도’만이 도마 위에 오른다.
‘성실 신화’가 노동의 착취를 미화했듯,
‘태도 신앙’은 구조적 폭력을 은폐한다.
착하게, 공손하게,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가 되는 사회.
그 속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은 언제나 ‘태도 불량자’로 기록된다.
직장에서 “조금 더 부드럽게 말했으면 좋겠다”는 피드백은
대부분 위계를 위협하지 말라는 암묵적 명령이다.
겸손하라는 말은 순종하라는 뜻이고,
밝은 미소는 불편을 감추라는 요구다.
결국 좋은 태도란 ‘기분 좋은 복종’을 의미하게 된다.
태도를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불편함에 둔감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태도는 진심이 아니라 연출된 매너이기 때문이다.
태도가 모든 걸 이긴다는 말은
사회가 불평등을 인정하기 싫어서 만들어낸 정신적 마취제다.
가진 사람은 그 말로 죄책감을 덜고,
못 가진 사람은 그 말로 자신을 탓한다.
“내가 더 노력했어야지.”
“내 태도가 부족했나 봐.”
이렇게 해서 구조는 계속 그대로 유지된다.
태도는 중요하지만, 그것은 결과를 바꾸는 무기가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는 기술이다.
공정하지 않은 시험에서 공손한 태도는 아무런 힘이 없다.
무너진 구조에서 예의는 단지 생존의 제스처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태도’를 믿기보다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그것이 나 자신을 탓하게 만드는 언어로 변질될 때,
그건 더 이상 인격의 문제가 아니다.
권력이 감정의 형태로 자신을 숨기는 방식이다.
진짜 태도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기분 좋은 말투’가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감당하려는 용기라고 생각한다.
다정하되 비겁하지 않고, 공손하되 침묵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사회가 잃어버린 품격이다.
태도는 중요하지만, 그 태도가 누구를 위해 작동하는가를 묻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같은 문장에 속을 것이다.
“모든 걸 이기는 건 태도야.”
아니, 아니다.
모든 걸 바꾸는 건, 결국 진실을 말하는 태도다.
태도는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이미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다.
이제 그 현실을 인정하자.
그리고 그 위선적인 위로의 문장을
“태도면 다 된다”는 그 말을
더 이상 믿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