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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일기

by 달빛소년

나는 아직도 그 그림 일기장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버려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걸 손에 들면 그동안의 일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서랍 깊숙이 밀어놓고도, 밤마다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은 담임선생님 전화로 시작됐다.


“어머님, 하늘이가 요즘 그림일기 내용이 조금 반복돼서요. 걱정하실 부분은 아닌데… 한 번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늘이 가방에서 꺼낸 그림일기 마지막 장은 검은 크레파스로 강하게 칠해져 있었다.

그 위에 눌러쓴 글씨가 있었다.


오늘도 아저씨가 놀아줬다.png


'오늘도 아저씨가 놀아줬다.'


처음엔 웃어넘겼다.

아이들은 낯선 어른을 전부 아저씨라고 부르니까.


그런데 다음 장을 넘기자, 공원 벤치에서 하늘이 옆에 서 있는 ‘얼굴 없는’ 실루엣이 있었다.

나는 하늘이에게 물었다.


“누구야?”


“몰라. 공원에서 만났어.”


단순한 대답. 그땐 정말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틀 뒤 그림일기 속 배경은 우리 아파트 단지의 슈퍼 앞이었다.

하늘이 옆에는 또 같은 검은 실루엣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언제?”


“어제.”


곳곳에 있는 감시카메라 아래에서 비슷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이때부터 불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림 속 배경은 우리 아파트 1층 공동현관이었다.

도어록 위치, 유리창 형태, 바닥 무늬까지 너무 정확했다.


“여긴 어떻게 그렸어?”


하늘이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저씨가 같이 들어왔어.”


나는 그 말을 하늘이의 ‘과장’이라고 믿었다.

아이들은 자주 사실과 상상을 섞는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계속됐다.


그다음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일기장에는 우리 거실 구조가 사진처럼 그려져 있었다.

소파 배치, TV장, 러그, 테이블…

심지어 내가 며칠 전 옮겨놓은 화분 위치까지 동일했다.


“이건… 어떻게 그린 거야?”


하늘이의 대답은 짧았다.


“아저씨가 창문으로 봤대.”


우리 집은 1층이다.

저녁에 불을 켜면 블라인드 아래 틈으로 거실 일부가 보이긴 한다.

그걸 정말 누군가가 봤을까?


나는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때는 단지, 이 정도 조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그림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날 일기엔 우리 부부 침실이 그려져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달린 장식, 내가 잘 때 책 위에 올려두는 물컵, 화장대 서랍 속 귀걸이, 휴대폰 충전기 위치까지 그대로였다. 하늘이의 작은 키로는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나는 하늘이에게 말했다.


“너 이 방 어떻게 알아?”


하늘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아저씨가… 엄마 자는 거 예쁘대.”


나는 말을 잃었다.

침실은 외부에서 보일 리가 없다.

그림에는 검은 실루엣이 침대 발치에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결국 CCTV를 확인했다.

단지 놀이터 근처에서 같은 시간대마다 서성이는 남자 한 명이 있었다.

그냥 지나가는 주민인지, 아니면 진짜로 하늘이 주변을 맴도는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경찰에 신고하기에는 애매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하늘이에게 진실을 물었다.


“그 아저씨… 진짜 있어? 누구야?”


하늘이의 말은 늘 단순했다.


“학교 끝나고 집 올 때 아저씨가 같이 걸어줬어.”


“우리 집까지 따라왔어.”


“아저씨가 집 안도 보고 싶대.”


나는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너… 그 아저씨한테 집 위치 알려줬어?”


하늘이 목소리는 작았다.


“응… 근데 괜찮아. 아저씨는 무서운 사람 아니야.”


그 말이 더 무서웠다.

그리고 문제의 마지막 장면이 등장했다.

그림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저씨가 오늘은 집에 들어오고 싶대.”


그 옆에는 하늘이가 현관문을 열어주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문틈 안쪽까지 검은 크레파스로 진하게 칠해져 있었다.


마치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을 강조하듯.

나는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있었다.


“내가 열어줄 거야.”


문득, 남편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여보… 이거 진짜 누군가 집안을 보고 있는 거 아니야?”


나는 문을 여러 번 잠가보고, 창문도 확인했다.

모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림 속 실루엣은, 분명히 집 안을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거실 불을 끄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현관 앞 바닥에 진흙 묻은 발자국 두 개가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문 앞에서 갑자기 사라진 듯, 발자국은 거기서 딱 끊겨 있었다.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위치였다.

하지만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발자국을 닦지 못하고,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진짜 누가 왔던 걸까?

하늘이에게만 보인 존재였을까?

단지의 그 남자였을까?

아니면… 그림일기에만 존재하던 어떤 것?

나는 지금도 모른다.

아직 답이 없다.


그리고 며칠 전, 하늘이가 다시 그림일기를 꺼내 들고 말했다.


“아저씨가 오늘은 우리 집 말고 놀이터에서 기다린대.”


하늘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하늘이의 팔을 붙잡았다.


“오늘은 안 돼. 위험해. 나가지 말자.”


하늘이는 그 말을 듣고 표정이 굳어졌다.


“왜? 아저씨 기다린다니까!”


“그래도 안 돼. 절대 나가면 안 돼.”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하늘이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쳐냈다.


“엄마는 맨날 그래! 아저씨 착하다니까! 왜 맨날 못 나가게 해!”


그렇게 소리치더니 그대로 방으로 뛰어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나는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지금이 맞는 행동인데도, 하늘이의 분노가 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하늘이 방 문 아래로 새어 나오는 작은 그림자 하나가 흔들렸다. 하늘이가 화가 난 상태로 서 있는 것 같았다.


“하늘아… 미안해. 그냥 오늘은 안돼”


그 말을 겨우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문 아래 틈에서 바람이 스치는 것 같은 아주 낮은 기척이 들렸다.

찰나의 순간.

분명히 하늘이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고 긁힌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방 안쪽에서 아주 또렷하게 들려왔다.


“… 들어가도 돼?”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가슴이 턱 막혀, 호흡이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방에서는 하늘이의 인기척이 전혀 나지 않았다.

울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하늘이가 지금 방 안에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문고리를 잡으려다 손을 멈췄다.

그 낮고 낯선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문, 열어줘도 돼…?”


그 목소리는

‘밖에서 들어오려는 누군가’의 목소리인지,

‘이미 방 안에 있는 무언가’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이 방 문 아래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두 개로 겹쳐졌다.


문 아래 틈에서 낮고 긁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 무서운 사람 아니야.”


그건 하늘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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