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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사치재라고 부르는 세상에서

by 달빛소년

요즘 SNS에서 사람들은 아이를 “사치재”라고 부른다.


사치재는 인간의 삶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지만, 소득이 늘어날수록 수요가 비례적으로 증가하는 재화를 말하는데,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세상이 드디어 미쳐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기쁘게 맞이하고, 이름을 지어주고, 작은 손을 잡아주는 그 존재를 가격표 붙은 상품처럼 부르다니.. 잠시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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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표현이 지나치다고만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큰 비극이다. 아이를 낳는 순간, 기쁨보다 먼저 계산기가 돌아간다. 양육비, 교육비, 의료비, 보육 공백, 직장 리스크. 하나하나 숫자를 더할 때마다 행복의 무게보다 부담의 무게가 더 빨리 자란다.


출산 직후 병실에서 갓 태어난 아이 얼굴을 보며 울었던 그 순간에도,

머릿속 한편에서는 벌써 숫자가 움직인다.

“산후조리원 300만 원… 기저귀 한 달에 10만 원…”


돌이 되기도 전에,

“예체능은 언제부터 시킬까? 어린이집 월 60만 원이면 가능한가?”

이런 질문이 일상이 된다.


아이가 한 번 열이라도 나면

병원비보다 갑작스러운 연차 사용과 팀장 눈치가 더 무겁게 마음을 누른다.

“아, 또 오늘 빠져야 하나…”

그 한숨에는 비용보다 큰 경력 리스크가 들어 있다.


어린이집 알림장에

“오늘은 등원 어려울 것 같아요”라는 문장이 뜨는 순간,

맞벌이 부부는 복권 당첨보다 어려운 일정 조율을 시작한다.

누가 빠질지, 누가 상사에게 말을 해야 하는지,

하루 공백으로 깨지는 업무 흐름이 머릿속에서 한 번 더 계산된다.

여름방학.. 겨울방학.. 돌봄 공백은 왜 이리 많은지


어린이집 대기번호를 확인할 때면

“정규직 vs 비정규직, 빠른 생일 vs 늦은 생일”이

어린 생명을 두고 경쟁 구도처럼 작동하는 현실이 선명하게 노출된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면

또 다른 계산이 시작된다.

“돌봄 교실 넣으면 월 10만 원, 학원 시작하면 한 과목 20~30만 원,

여름·겨울 캠프까지 합치면…”

종이에 적으면 더 무서워져서

아예 계산을 포기하는 부모도 있다.


실제로 많은 부모들이 말한다.

“둘째를 낳고 싶지만, 한 달에 150만 원이 더 드는 걸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욕망이 아니라, 생존의 계산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한다.


이런 모든 순간들이 쌓여

행복의 무게보다 부담의 무게가 더 빠르게 자라난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 3억, 5억, 7억…”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아이의 가치가 아니라 아이를 키우기 위해 잃게 되는 노동력, 경력, 시간, 자유!! 그 모든 것의 가격을 더하고 또 더해 결국 아이가 “소비재”처럼 평가된다.


이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한 생명을 기르는 일이 “경제적 감당 가능성”이라는 이름의 문턱을 넘지 못해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접혀버리는 세상.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엄마는 사랑을 품었지만,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경제를 먼저 걱정해야 하는 모순 속에서 산다. 마음은 풍요로운데, 세상이 말한다. “그 풍요는 네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거냐”라고.


그리고 아이는, 그 어떤 생명보다 가장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 아이는 어느새 “사치재”로 불리고, 출산은 “경제적 선택”으로 분류된다. 한탄스럽다. 여기까지 오게 된 우리의 세상이. 과거엔 아이가 집안의 기쁨이었고, 마을의 축복이었고, 더 넓게는 사회의 희망이었다.


이제는 SNS에서는
“애가 사치야”
“애 낳으면 내 삶 끝남”
“애 낳는 사람은 금수저”
이런 말이 아무렇지 않게 오간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아이의 가치를 따지기 전에 먼저 비용부터 떠올리게 만드는 세상.
사랑을 숫자로 대체한 구조.

삶을 경제성으로만 평가하는 병든 시선.


그래서 나는 종종 생각한다. 지금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부자여서가 아니라, 어쩌면 세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인간성으로 버티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알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데 돈이 드는 게 아니라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이 아이를 ‘젠트리피케이션’해버렸다는 사실을.


아이를 사치재라고 부르는 건 아이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사람의 가치를 경제에 종속시키는 데 익숙해진 증거다.


나는 그런 세상을 한탄한다. 사랑이 사치가 되고, 삶이 계산이 되고, 미래가 비용이 되는 세상을.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희망이라고. 그 희망을 지키기 위해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지금은 한탄뿐이지만, 한탄조차 사치인 세상은 정말, 너무 잔인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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