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프롤로그 : 충성과 반역, 그리고 전쟁의 기억

일본의 태평양 전쟁의 기억과 그 책임에 대해

by 김휘찬

1969년 1월 2일, 천황의 궁궐인 도쿄(東京)의 황거(皇居). 일반 국민이 직접 천황을 만날 수 있는 공식행사인 '일반참하(一般参賀)'로 인해, 황거는 수많은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천황의 즉위나 생일이 아닌 이상, 지금과 같은 신년 일반참하만이 천황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었지요. 게다가 1969년의 신년 일반참하는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황거가 "새롭게" 완공된 뒤 처음으로 맞이하는 일반참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945년 도쿄 대공습으로 인해 황거가 파괴된 이후에, 1968년까지의 일반참하는 모두 궁내청 건물의 옥상이나 임시로 세운 조잡한 건물에서 해왔습니다.

AS20211231000915_comm.jpg 1969년 1월 2일 있었던 일반참하(一般参賀)의 풍경. 새롭게 지어진 발코니에서 히로히토 천황이 손을 들어 대중에게 인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1969년의 일반참하는 천황에게나, 일반 국민들에게나 큰 의미를 담고 있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이를 반영하듯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고, 분위기는 고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발코니에서 천황과 황족들이 등장하면서 한층 더 무르익었습니다. 거의 70세에 다다른 히로히토(裕仁) 천황은, 환호하는 대중들에게 손을 들어 화답했습니다. 완공된 새로운 궁전에서 손을 흔드는 천황의 모습은, 이젠 패전(敗戰)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본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천황의 손짓에 많은 이들은 함께 손을 흔들며 화답하거나, 감격에 겨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훈훈한 풍경은 어느 한 남자에 의해 의해 무참히 깨지고 말았습니다.


"야마자키! 천황을 쏴라!(ヤマザキ、天皇を撃て!)"


홀연히 인파 속에서 뛰쳐나온 오쿠자키 겐조(奥崎謙三)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태평양 전쟁에서 죽은 전우의 이름을 외치며 천황이 서있는 발코니를 향해 새총을 당겼습니다. 그러나 탄환인 파칭코 구슬은 발코니의 근처에서 힘없이 떨어졌고, 그는 즉시 사복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그렇게, 황거 한복판에서 벌어진 자그마한 반역사건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오쿠자키는 그의 몸을 던졌으나, 천황에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쿠자키에게 한 가지 위안이 될만한 사실은, 그 사건 이후로 천황이 등장하는 발코니의 유리가 방탄유리로 바뀌었다는 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 오쿠자키 겐조는 도대체 왜 일본의 상징이자 인기 있는 존재인 천황을 쏘게 된 것일까요?

IE002305418_STD.jpg 작은 반란사건의 주인공, 오쿠자키 겐조(奥崎謙三).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ゆきゆきて、神軍)>(1987)에서의 모습.

오쿠자키 겐조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3월, 호주와 맞닿은 뉴기니 전선에 투입되었던 독립 공병 제36연대 소속의"황군(皇軍)"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과달카날 전투(Battle of Guadalcanal)에서 패배로 인해 그가 투입된 뉴기니 전선의 전황도 매우 불리했고, 결국 그의 부대는 패주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본토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남방의 정글섬, 그 속에서 그와 그의 부대는 기아와 질병에도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연대장 이하 거의 모든 부대원이 굶어죽고 부대는 이미 와해된 상태로, 그는 1944년 7월 18일 뉴기니의 뎀타(Demta)라는 곳에서 호주군의 식량을 훔치다가 적발되어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후 포로생활을 마친 그는 1946년 3월,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전장에서 그가 느꼈던 감정 그대로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해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와 같은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왜 "옥쇄(玉碎)"와 같은 비상식적인 지시를 받아야만 했는지,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물음에 대한 해답은, "천황이야 말로 전쟁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로 귀결되었습니다. 그의 '새총 사건'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태평양 전쟁은 아직까지도 수많은 숨겨진, 아직 끝맺어지지 못한 담론들이 가득 차있습니다. 그리고 그 담론들은, 결국 지금의 우리에게도 역사적 아픔과 더불어 일본과의 갈등이라는 형태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일본은 올바르게, 똑바로 "이해"하는 일은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이해"라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상대방의 행동을 감싸주고 용납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방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본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가깝고도 먼 나라, 있는 그대로의 일본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책을 통해 많은 분들에게 잘 알지 못했던, 일본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는 아시아 - 태평양 전쟁이라는 시각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일본이 대체 왜 이런 무모한 전쟁이 뛰어들었는지, 왜 그렇게 이해되지 않는 방법으로 미국과의 전투를 벌였는지 등의 단순한 궁금증 차원의 문제를 뛰어넘어서, 일본의 진정한 전쟁 책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풀어낼 것입니다. 특히, 천황이 전쟁을 막기 위해서 강경한 개전론자였던 도조 히데키를 총리로 임명한 일, 그리고 도조 히데키는 천황의 명을 받들어(?) 전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회의의 나날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과거 일본의 행동을 비호하거나 두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도조 히데키의 이런 무능력한 관료주의적 태도를 수면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전쟁 책임에서 천황을 배제하고 전쟁 이후의 정치공학적 설계를 지속했던 일본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일본의 저널리스트 역사학자인 호사카 마사야스가 했던 말처럼, "도조 히데키라는 아주 나쁜 사람이 있었고, 이 나쁜 사람이 군부를 지휘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허상"을 깨부숴야지만, 진정한 태평양 전쟁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과거의 가해자이자, 현재의 협력대상자인 일본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태평양 전쟁의 드라마틱한 현장에 함께 하시게 될 것입니다. 진주만 기습을 앞두고, 보도자료를 기다리던 해군성 지하실의 기자들의 사이에, 그리고 미국과의 개전 여부를 앞두고 밤새워 갑론을박이 벌어지던 총리관저 회의실의 한편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을 지휘하던 나구모 제독의 함교 안에, 과달카날의 울창한 밀림과 레이테만의 푸른 바닷속까지.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로 구성된 그날의 전투 속으로 말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에필로그:시작되는 또다른 전쟁, 그리고 작가의 변(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