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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일본의 전쟁 기억과 그 책임에 대하여

by 김휘찬

24년 6월 말, 일본의 전쟁에 대해 현장에서 더 느껴보고 싶어 히로시마를 다녀오는 일정으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특히, 일본 해군의 군항이었던 구레를 포함해 히로시마, 거기다 도쿄까지 다녀왔습니다. 특히 구레의 야마토 박물관이나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 같은, 우리에게는 조금 불편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곳을 특히 중점적으로 들렀습니다. 그리고 뭔가 조금 더 알고 싶어 졌습니다. 대체 이들은 왜 전쟁에 뛰어들었고, 그 전쟁을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뉴스에서 보던 것처럼 매일 욱일기를 들고,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안달이 난 민족일까? 같은 생각도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야스쿠니 신사와 그 옆의 전쟁 박물관인 유취관(遊就館, 유슈칸)은 자신들의 전쟁을 정당화하고, 또 아시아인들을 서구 열강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프로파간다에 매우 충실한 곳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인도를 침공하고 있는 일본군을 구원자로 묘사하고, 서로 환하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드는 인도인들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을 보았을 때에 특히나 이런 저의 생각은 거의 굳어졌지요. 유취관을 빠져나오면서 저는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들의 전쟁에 대해 제대로 정당화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사실 불쾌하기보다는, 조금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신들의 전쟁에 대해 안 좋은 부분은 이를 악물고 묘사하지 않고 있는 부분에서, "그래, 어느 나라던지 극단주의자들의 기분전환용 배출구는 필요하니까"하고 웃어 넘어갈 수 있었거든요.


그러나, 구레의 야마토 박물관의 접근 방법이 오히려 저를 더 불쾌하게 만들었습니다. 전쟁 찬양이나 미화보다도, 뭔가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다"는 묘사가 인간어뢰인 '가이텐'앞에 붙어있는 것을 보았을 때 더욱 그 불쾌감은 심해졌습니다. 차라리 야스쿠니와 극우처럼 자신들의 전쟁을 정당화하기라도 하면 싸우기라도 하겠는데, 자신들을 피해자로 정의해 버리니 그 불쾌감은 몇 배나 더 상승했지요. 저는 여기에서 일본이 가해자냐, 아니면 피해자냐와 같은 이분법적인 논리를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일본은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다,라는 명제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지도 않고요.


일본은 분명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식민지 청년들과 자국 청년들을 가망도 없는 전쟁터로 이끌어 죽음으로 끌고 갔습니다. 앞서 살펴본 오쿠자키 겐조뿐만 아니라, 다양한 일본인들이 이러한 전쟁의 책임에 대해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력들은 종전공작을 통해 '일본 군부가 나빠 전쟁을 일으켰고, 천황의 성스러운 결단으로 멸망직전의 일본은 구원받았다'는 신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정치 세력들은 전후에도 살아남아 권력을 유지했지요. 그런 가운데 '천황'에 대한 전쟁책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뒤에 숨어서,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천황의 전쟁책임, 이것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이 책임문제가 현재 일본이 왜 과거사 문제에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인지를 우리가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주는 메시지 때문이 아니라, 마치 그 표현이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전가의 보도처럼 '악용'되고 '남용'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마치 무조건적으로 '일본은 악이고, 일본이 전쟁 중 벌인 모든 일들은 모두 나쁜 것이니 일본의 모든 사람들이 다 나쁘다'는 식의 민족주의적인 과격한 주장에 논리로만 사용되는 것 같아서 더욱 그렇습니다. 책을 쓰면서 히로시마에 살아남은 일본인들의 처참한 상황을 공부하면, '자업자득인데, 왜 그들의 처참함을 묘사하면서 걔들을 피해자로 묘사해?'라는 공격 아닌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러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빼고, 일본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해야, 일본과 싸워 이기던, 아니면 이웃나라이자 협력자로 관계를 맺던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인들의 의식 전환도 분명히 필요합니다. 일본인들 스스로도 "전쟁은 무조건 도조와 군부의 독재 때문이었어! 우리도 하고싶지 않았어!"라는 간단한 명제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설명해 버린다면, 진짜 뒤에 숨겨져 있는 태평양 전쟁의 다양한 담론을 논의할 수 조차 없기 때문이지요. 일본인들 또한 국가의 의한 폭력, 카미카제 등의 자살공격을 강요받았고,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무의미하게 희생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스스로의 자각과 책임이 없다면, 그저 "우리 일본인들도 많이 죽었다. 일본인들에게도 아주 힘든 전쟁이었다. 우리도 피해자다"라는 의식에 갇혀 과거 역사문제를 영영 해결할 수 없게 되겠지요.


최근 도래한 미중 패권경쟁의 시대와 대만해협에서의 고조되는 긴장 등, 동북아시아의 안보위협이 급증하고 있는 국제상황 속에서, 우리는 좋든 싫든 이웃나라인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우리가 이런 태평양 전쟁까지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일본과 일본인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매우 예민하고, 또 그 예민한만큼이나 접근하기 힘들었던 태평양 전쟁의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묘사된 전쟁의 이야기들은 어떠셨나요? 어떤 분들은 조금 불편하시기도 했을 테고, 또 지명이나 인명이 어려워 읽기가 힘드신 분들도 계셨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입장에서 서술된 태평양 전쟁을 통해 왜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지, 그들이 어떻게 태평양 전쟁을 인식하고 어떤 교훈을 얻고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함께 알아볼 수 있었다면 저자로써 그것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존 다우어(John W. Dower)의 저서 <패배를 껴안고(Embracing Defeat)>에서 묘사된, 패전 이후에 있었던 한 일본 청년의 짧은 이야기로 태평양 전쟁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한 미 해군 전함 USS 미주리호의 갑판에서는 일본 정부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있었습니다. 레이테만 해전에서 침몰한 불침전함, 무사시에 탑승했던 수병 와타나베(渡辺)는 이 조인식 무렵 고향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태평양 전선의 최일선에서 전투를 겪었고, 전함이 침몰했음에도 살아남아 패전 이후 본토에 살아서 돌아왔던 그도 "황군"이었습니다. 천황의 충성스러운 병사였고, 전쟁터에서 일본 제국의 영광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싸워왔던 군인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찾아온 새로운 세상은, 기존까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을 완전히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목숨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천황은, 이젠 군복을 벗고 맥아더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어제 '미국, 영국과의 성스러운 전쟁에 나가 제국의 영광을 가져오자'라고 주장하던 신문들은, 오늘은 '군국주의자와 관료, 재벌의 음모로 인해 전쟁을 하고 말았다. 1억 국민 모두가 참회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와타나베의 초등학교 시절의 교사는 "전쟁이 져서 잘 됐다. 아니었다면 우리에겐 민주주의가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와타나베에게 말했습니다. 그 교사는 불과 몇 달 전 어린 학생들 앞에서 '미국과의 전쟁에 참전하자'라고 선동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와타나베는 '그때의 기억은 나지 않느냐'라고 묻고 싶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길을 걷던 도중, 다섯 명의 야쿠자가 "군인 떨거지"라고 비웃자 와타나베는 그들과 주먹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나 5명을 당해낼 수 없었던 그는 온몸에 부상을 입은 채 집으로 돌아와야 했지요. 집에 돌아와 고통 속에서 자리에 누워있던 와타나베의 가슴속에선 불길이 솟아올랐습니다. 자신이 타고 전장에 나섰던 그 '무사시'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본토를 향해 주포를 발사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록을 일기에 남겼습니다.


"천황이란 뭐냐? 일본이란 뭐냐? 애국이란 뭐냐? 민주주의란 뭐냐? '문명국가'란 뭐냐? 다, 전부 다 뒈져버려라. 거기에 침을 뱉는다."(출처 각주)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천황은 '절대군주'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빠르게 자신의 이미지를 변신시키고 있었습니다. 와타나베는 천황이 사이판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와 담소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천황은 그 병사에게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라고 격려했다고 하지요. 누군가가 들었으면 감동실화일 이 이야기가 와타나베에겐 더없이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느껴졌습니다. 왜 "고생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라고 한 마디 사과조차 못하는 거지? 와타나베는 참을 수 없어졌습니다.


와타나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한 글자 한 글자씩 천황에게 부칠 편지를 써 내려갔습니다. 더 이상 천황은 그에게 '폐하(헤이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당신(아나타)'라는 표현으로 천황을 지칭했지요. 그리고 그는 펜을 들어 하나씩 하나씩, 계산을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전쟁 중 국가로부터 받았던 군복과 모자, 먹었던 음식, 작은 보급품 하나하나까지도 빼먹지 않고 적어 내려 간 그는 모든 가격을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최종금액은 총 4281엔이었습니다.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그는 점차 환멸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환멸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녹아있었습니다. 하와이 진주만의 새벽하늘, 미드웨이의 푸른 바다, 과달카날의 정글에서부터 짙은 밤 속에서 불타오르던 레이테, 그 모든 곳에서 벌어진 수많은, 또다른 여러 와타나베의 기억들이.


천황의 황군으로서, 그는 그렇게 천황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정리했습니다. 나를 전쟁에 내보냈고, 또 전쟁이 끝난뒤엔 자신이 살고자 나를 버렸던 천황 말입니다.


그는 봉투에 4281엔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마무리했습니다.


"이제 내가 당신에게 빚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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