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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영 발표'와 미드웨이(大本営発表とミッドウェー)

by 김휘찬


들어가면서


1937년 11월 20일, 중일전쟁 발발 약 4개월 후에 대본영이 설치되었다. 이는 일본에서 세 번째 대본영 설치였으며, 첫 번째는 청일전쟁(1894–95), 두 번째는 러일전쟁(1904–05) 때의 설치였다. 세 번째 대본영에서는 이전 두 차례와 달리 새로운 조직이 그 내부에 설치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육군과 해군 각각에 설치된 ‘보도부’였다. 이 보도부는 소장 또는 대령이 부장을 맡고, 각각 10여 명의 부원으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보도부의 임무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대내·대외 및 적국에 대한 선전·보도에 관한 기획과 실행”에 있었으며, 이 보도부의 설치 자체가 일본 군 조직이 언론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중 선전과 신문 발표를 담당하는 ‘신문 발표계’가 국민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창구로서, 전황, 특히 자국 군대의 작전에 관한 발표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이 공식 발표가 바로 ‘대본영 발표’였다. 일반적으로 이 발표는 육군성과 해군성 내 기자 클럽에서 이루어졌다.

Announcement_from_Imperial_General_Headquarters1.jpg?type=w773 진주만 공습 결과를 발표하는 대본영 해군부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 중 약 45개월 동안, 이 대본영 발표는 총 846회에 이르렀다. 그 첫 번째 발표는 1941년 12월 8일 오전 6시에 있었으며, 그 내용은 “제국 육해군은 금일 8일 새벽, 서태평양에서 미·영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즉, 대본영 발표는 보도부 설치로부터 4년 후인, 태평양전쟁 개전과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개전 다음 날인 12월 9일에는 해군보도부장 담화 형식으로 다음과 같은 성명이 발표되었다.


“우리 해군의 전황 보도에 있어 특별히 정확을 기하기 위해, 또는 작전상 요구 등으로 인해 발표 시기가 다소 늦어질 수도 있으나, 결코 염려하지 마시고, 안심하고 우리 보도를 신뢰해 주시기 바란다.”


본고에서는, 이처럼 시작된 해군의 대본영 발표에 대해, 특히 개전 후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해군이 처음으로 큰 패배를 겪은 미드웨이 해전까지의 경위를 추적하고, 이 작전과 전황 보도 간의 관계를 고찰하고자 한다.






1. 대본영 발표의 신뢰성(大本営発表の信頼性)


개전 초기에 있었던 일본 해군의 전황 보도, 특히 첫 번째 공격이었던 진주만 공습의 사례를 보면, 해군보도부장의 성명대로 정확성을 기하기 위한 신중한 발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진주만 공격은 12월 8일 새벽에 시작되었으며, 해군보도부가 이에 대해 처음 보도한 것은 약 9시간 반이 지난 오후 1시경이었다. 이후 12월 18일까지 10일간 총 4회에 걸쳐 전황이 발표되었다.


2차 발표(12월 8일 오후 8시 45분) 당시, 실제로는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미 전함 전부 8척이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발표에서는 피해를 입은 것으로 확인된 전함 수를 6척으로 축소하여 전달하고 있었다. 결국, 이 8척의 전함에 대한 피해 상황(전함 4척 격침, 3척 대파 등)은 네 번째 전황 발표(12월 18일)에서야 비로소 확정되어 보도되었다.


한편, 이 기간 동안 격침되었다고 발표되었던 미 항공모함에 대해서는, 4번째 발표에서 그것이 오보였음을 인정하였다. 즉, 해군은 중요 목표물인 항공모함에 대한 전과를 하향 조정하는 정도로, 정확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본영 발표의 상대적 정확성은 전쟁 개시 후 첫 6개월 동안 유지되었다고 여러 연구들에서 지적되어 왔다. 그리고 1942년 6월 5일의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발표의 정확성이 점차 상실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4fbbfcf66_6d4da8fc.jpg?type=w773 항공모함의 함교에서 지휘중인 나구모 주이치와 참모 장교들의 모습

실제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항공모함 4척을 상실(격침)하는 큰 손실을 입었지만, 6월 10일의 대본영 발표에서는 “1척 격침, 1척 대파”라는 식으로 절반 이하로 피해가 축소되어 발표되었다. 이때, 해군보도부 내부에서는 “국민에게 패전 사실을 알림으로써 분발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하에, “2척 격침, 1척 대파, 1척 경미한 손상”이라는 보다 실제에 가까운 발표안이 제안되기도 했다. 그러나, 해군 작전부가 “국민의 사기와 전의 상실을 막아야 한다”는 강한 반대 입장을 보이면서, 결과적으로 “1척 격침, 1척 대파”라는 내용으로 발표가 이루어진 것이다.


동시에 발표된 미국 측 피해 상황에 대해서는 “항공모함 2척 격침”이라고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1척만이 격침되었을 뿐이다. 이로 인해 국민들에게는 “일본이 다소 우세하다”, 즉 “패배하지 않았다”는 인식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 측 피해의 은폐와 미국 측 피해의 과장은 그 이후 태평양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점점 더 심화되었다. 국민들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도 전황이 일방적으로 악화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통해서는 연전연승의 보도만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허구의 승전보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44년 10월의 대만 해역 공중전(타이완 항공전)에 대한 대본영 발표였다. 이 전황 발표에서는, 일본 항공부대가 미 항공모함 19척을 격침 또는 파괴했다고 전해졌다. 이는 당시 미 항공모함 총 17척을 전멸시켰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국 측은 이 전투에서 항공모함 1척도 잃지 않았고, 단지 2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이 대본영 발표는 거의 100% 과장된 보도였으며, 정확성이나 신중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해군 내부에서는 이후 이 발표가 허위 정보였음을 인지했고, 미 항공모함에 대한 실제 피해도 많아야 4척 수준이라는 것을 파악했지만, 그 발표의 정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미 항공모함 전멸’이라는 허위 정보조차 육군은 물론 해군 최고위층에까지도 보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 육군은 이후 필리핀 작전이라는 최대의 결전에서, 이 허위 정보를 그대로 믿고 작전을 대폭 수정하였으며, 이로 인해 치명적인 실책을 범하게 되었다. 즉, 대본영 발표가 일본의 전쟁 지도 자체를 왜곡시키고 망쳐 놓은 것이었다.


한편, 이 대만 해전에서의 대승 보도는 국민의 전의를 크게 고무시켰다. 이는 마치 러일전쟁 당시 일본해 해전에서의 승리 보도에 필적하는 사기 진작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정보는 허위와 과장으로 가득 찬 전혀 사실이 아닌 정보였으며, 이러한 전쟁 말기의 대본영 발표 실태가 전후 일본 사회에 알려지면서, "대본영 발표"는 곧 "거짓말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다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쟁 초기의 대본영 발표는 일정 수준의 정확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 오차도 전쟁 말기의 '10척 단위' 과장과는 달리, 기껏해야 1~2척 수준의 전황 보도에서 피할 수 없는 정도의 오차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쟁 초기에 미국 항공모함이 태평양 전체에서 고작 5척뿐이던 상황에서는, 이 1~2척의 오차조차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2. 미드웨이 해전까지의 대본영 발표(ミッドウェー海戦までの大本営発表)


1941년 12월 초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약 5개월간, 일본군은 동남아시아 지역 등 중요한 자원지대를 점령하는 1차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다음 2차 작전을 준비했는데, 이는 미래 하와이 공략의 전제로서 미드웨이 섬 공략 작전을 계획한 것이었다. 동시에 알류샨 열도 공략도 포함된 이 미드웨이 작전에는 연합함대의 대부분 병력이 투입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작전에 투입된 병력의 핵심은, 진주만 공격 이래 서태평양부터 인도양까지 활약해 온 항공모함 부대였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과 미국의 항공모함 부대가 각각 주력 병력이었다는 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전쟁은 넓은 태평양에서의 제해권(制海権) 확보 여부가 승패를 결정지었으며, 그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항공모함 부대였다. 개전 초기부터 항공모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일본 해군은 진주만 공격에서도 미국 항공모함을 주요 목표로 삼았지만, 마침 출항 중이던 미국 항공모함 부대는 무사히 빠져나갔다. 대신 해전에서 주역의 자리를 급속히 잃어가던 전함 부대만을 진주만에서 격침·파괴했다. 이렇게 놓친 미국 항공모함 부대는 이후 일본 해군에게 큰 불안 요소가 되었다.

그 불안이 현실이 된 것은 1942년 4월 중순, 미국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도리틀 폭격대가 도쿄를 폭격한 사건이었다. 이후 일본 해군은 어떻게든 미국 항공모함 부대를 포착·격멸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미드웨이 작전 계획은 “미국 항공모함의 일본 본토 접근을 어렵게 하고, 이 작전을 계기로 미국 항공모함을 포착·격멸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작전 개시 시기도 1942년 6월 초로 서둘러졌다.

이처럼 미드웨이 작전에서 일본 해군의 중요한 목표가 된 미국 항공모함이었지만, 사실 미드웨이 작전 이전 단계에서 대본영 발표로 보도된 미국 측 피해를 합산해 보면 이미 4척의 미국 항공모함이 침몰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1척은 미확인 상태였다). 다음은 그 일련의 대본영 발표 내용이다.

1942년 1월 14일 오후 3시 발표. 제국 잠수함이 12일 저녁 하와이 서쪽 해상에서 미 태평양 함대 소속 항공모함 ‘렉싱턴’형 1척을 어뢰 공격... 동함은 침몰이 확실한 것으로 인정됨.
1942년 2월 26일 오후 4시 45분 발표. 제국 해군 항공부대는 2월 21일 뉴기니 북동쪽 수백 해리 해상에서 항공모함을 포함한 강력한 적 부대를 발견... 적 항공모함을 대파하고 대화재를 일으킴... 피해 상황으로 보아 침몰한 것으로 추정하나, 최종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침몰 확실하지 않음.
1942년 5월 12일 오후 4시 30분 발표. 5월 7일, 8일 산호해 해전 종합 전과는 다음과 같음. 함정: 미 항공모함 사라토가형 1척 격침, 미 항공모함 요크타운형 1척 격침...

만약 이 일본 대본영 발표 수치가 정확하다면, 이 시점까지 미국이 태평양에 전개한 항공모함은 총 5척에 불과했으므로, 미드웨이 해전에 참여한 미국 항공모함은 1척에 불과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듯, 실제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3척의 미국 항공모함이 일본 항공모함 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3. 대본영 발표와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패전(大本営発表とミッドウェー海戦での敗戦)


대본영 발표의 전황 보도 내용은 대본영 내 육해군 각 작전부가 결정하였으며, 보도부는 그것을 외부에 전달하는 스피커 같은 역할에 가까웠다. 다만, 미드웨이 해전 이전 단계에서는 작전부에 전황 보도를 과장하는, 즉 적측의 피해를 과대평가하고 아군의 피해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나 필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때까지의 대본영 발표는 일본군의 전황 판단을 거의 그대로 반영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발표가 정직했다는 의미이지, 정확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까지 미국 항공모함 4척 침몰이라는 발표 역시 정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오차는 어느 정도였던 것일까?

Dai-hon-ei_Happyou_to_annouce_Japanese_military_victory_in_the_battle_of_Mid.png?type=w773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를 발표하는 일본 해군 보도부 (1942년 6월 12일)

결론부터 말하면, 미드웨이 해전까지 침몰한 미국 항공모함은 단 1척뿐이었으며, 그것은 앞서 언급한 대본영 발표의 (㉫) 사라토가급 1척(실제로는 렉싱턴)의 침몰이었다. 즉, 4척 침몰은 1척 침몰의 잘못된 발표로 3척이라는 큰 오차가 발생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 3척이라는 숫자는 미드웨이 해전에 참여한 미국 항공모함의 총수였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오차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일본 측, 특히 작전부대인 나구모(南雲) 항모부대(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이끄는 일본 해군 기동부대 - 역주)가 미국 항공모함이 이미 한 척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나구모 부대는 미국 항공모함이 몇 척 존재하며, 그것들이 정말 미드웨이 앞바다에 나타날지 끝까지 알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미국 항공모함의 상황은 실제로 어땠던가? 앞서 일본 대본영 발표와 비교해 다음과 같이 분석해본다.


먼저 미국 항공모함 침몰에 대한 최초의 대본영 발표는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 시 1척 침몰로 발표되었으나, 곧 잘못된 발표로 밝혀져 침몰이 취소된 사실은 앞서 언급하였다. 다음 항공모함 침몰 대본영 발표는 (㈰) 1942년 1월 일본 잠수함에 의한 항공모함 렉싱턴 격침이었다. 다만 실제 공격받은 것은 동형함 사라토가였고, 침몰까지 이르지 않은 어뢰 1발 명중에 그쳤다. 그럼에도 이 사라토가는 수리를 위해 이후 미국 서해안으로 돌아가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 다음 (㈪) 1942년 2월의 항공모함 침몰 발표는 소위 허보(가짜뉴스)로, 그때 손상된 미국 항공모함은 없었다. 다만 일본 측도 이 (㈪) 발표에 대해서는 “미확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 산호해 해전(1942년 5월)에 관한 대본영 발표에서는 항공모함 2척 침몰 중 1척(렉싱턴)은 확실히 침몰했으나, 다른 1척(요크타운)은 침몰하지 않고 대파에 그쳤다. 다만 보통이라면 1개월 후 미드웨이 해전에 이 요크타운이 출전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암호 해독으로 일본의 미드웨이 공격을 파악한 미국은 응급조치를 통해 간신히 미드웨이 해전에 맞출 수 있었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 미드웨이 해전까지 태평양에 전개된 미국 항공모함 총 5척 중, (㈰) 침몰 1척은 실제 침몰은 아니었지만 미드웨이 해전에 출전하지 못했고, (㈪) 침몰 1척은 발표 오류였으며, (㉫) 침몰 2척 중 1척은 대파였으나 응급수리 후 미드웨이에 참가했다. 그리고 이 4척 침몰이라는 일본 발표에도 불구하고 남은 1척도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했다는 계산이 된다. 더구나 이 3척은 암호 해독으로 일본의 미드웨이 공격을 인지하고 매복하고 있었으며, 미드웨이 섬 자체도 그 비행장이 불침항모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Chuichi_Nagumo.jpg?type=w773 미드웨이 해전의 일본군 지휘관, 나구모 주이치 제독.

한편 일본 측 작전부대였던 나구모 항모부대는 미국 항공모함의 존재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을까? 사실관계로는 산호해 해전 이후 5월 15일 일본 정찰기가 남태평양에서 미국 항공모함 2척을 발견해, 미드웨이 해전 전 2척의 미국 항공모함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3척에 대해서는 거의 침몰한 것으로 보았다. 진주만 공격 이래 나구모 부대의 항공 참모였던 겐다 미노루와 비행대장 후치다 미쓰오도 (㈰)와 (㉫)의 사라토가, 렉싱턴, 요크타운 침몰을 거의 인정하고, 그로부터 남태평양에 2척이 남아있음을 역산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심리적으로 이미 절반 이상의 미국 항공모함이 침몰했고, 남은 2척만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구나 일본 측은 자신들의 암호가 해독되어 미국 항공모함이 미드웨이에서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미드웨이 작전의 목적에 미국 항공모함 부대를 유인해 포착·격멸하려는 의도가 있었기에, 미국 항공모함이 반격해 올 것을 기대하는 분위기조차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반드시 미국 항공모함 부대를 괴멸시킨다는 절대적 자신감(과신)을 나구모 부대는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일본 항공모함 4척 전멸(침몰)에 비해 미국은 단 1척만 잃은 참패였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패전 원인으로는 역시 일본 측의 안이함과 과신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작전 준비부터 작전 행동 전반에 걸친 문제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안이함과 과신이 생겼을까? 그것은 개전 이래 약 반년 동안, 해군에 있어서는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된 연전 연승의 자만심이 불러온 것이었다.


진주만 공격을 마친 나구모 부대가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나구모 부대 장병에게 “이기고도 투구의 끈을 조여라”라며 승리에 따른 자만을 경계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 야마모토조차 미드웨이 작전 입안 시 계획의 허술함과 신중함 결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안이함과 과신을 불러온 연전 연승의 보도야말로 바로 대본영 발표였던 것이다.


다만 대본영 발표와 상관없이,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한 일본 작전부대(나구모 부대 포함)는 적 항공모함 2척은 건재함을 알고 있었으며, 여기에 대본영 발표 (㉫)에서 침몰로 보도된 요크타운까지 더해 미국 항공모함은 총 3척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본영 발표의 오차도 결과적으로는 1척 정도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1척의 오차 영향은 이미 4척을 침몰시켰다고 생각하는 상황과 1척만 침몰한 실제 상황에서는 의미가 크게 달랐을 것이다. 전자는 남은 미국 항공모함 잔적 소탕(정리)을 의미했을 것이고, 후자는 동등한 전력의 항공모함 간 결전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구모 부대가 미드웨이 작전에 임한 분위기는 바로 전자였다. 그러한 안이함과 과신은 사령관에서부터 수병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출처 : 아이자와 아츠시(相澤淳), 전사 연구 연보 = NIDS military history studies annual / 방위성 방위 연구소 전사 연구 센터 편 (7), 122-128, 20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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