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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라푼젤 Jun 17. 2023

폭풍 속에서 외치는 짐승 같은 절규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서평

(*) 스포주의


독서모임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교과서나 참고서 외에 자발적으로 책을 읽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에 아직까지 한 번도 들춰보지 못한 고전과 명작이 차고 넘친다. 애독가들 입장에선 부러운 일이려나? <폭풍의 언덕>도 그랬다. 영화나 연극으로도 많이 각색되었고, 워낙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고전인지라 제목은 너무도 익숙하지만,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전혀 몰랐다. 세기를 넘어 사랑받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이니, 이 책이 내 마음도 사로잡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책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음울하고 처연하다. 몽글몽글하고 예쁜 영화, 인간 본성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책들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과는 사실 거리가 아주 먼 책이다. 등장인물들의 기괴한 광기가 내게는 다소 버거워 가끔 숨이 턱턱 막히기도 했다. 그러나 독서모임에 선정된 책이 아니었을지라도 아마 결국 나는 이 책을 완독 해냈을 것 같다. 확실히 요즘 나오는 그렇고 그런 뻔한 소설들과는 달리 색다른 매력과 문체, 폭풍 같은 흡인력을 가진 책이었고, 아주 긴 소설임에도 의외로 빠르게 완독이 가능했다. 

이런 것이 바로 막장드라마의 끊을 수 없는 매력인가...? 


우리가 둘 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붙잡고 있을 수만 있다면. 당신이 얼마나 괴롭든 나는 상관하지 않을 거야. 당신의 괴로움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야. (캐서린)


하지만 나를 떼어놓고 가면 난 죽는단 말이야! 캐서린 누나, 내 목숨은 누나 손에 달렸어. 누난 나를 사랑한다고 그랬지. 그렇다면 누나에게 괴로울 건 없을 거야. 가지 않을 거지? (꼬마 린튼)


당신은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 했지. 그러면 귀신이 되어 나를 찾아오란 말이야!... (중략)...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줘. 어떤 형체로든지. 차라리 나를 미치게 해 줘! 제발 당신을 볼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나를 버리지만 말아줘. (히스클리프)


너무도 기괴한 사랑의 고백이 아닌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를 비롯한 대부분 등장인물들의 사랑에는 광기가 서려있다. 숭고한 희생이나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은커녕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시종일관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반복한다. 오직 본능에만 충실한 그들에게서 사랑과 질투, 증오 외의 다른 감정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들은 늘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밑바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특히 주인공인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무덤을 파헤칠 만큼 무서운 집착을 보여주며, 워더링하이츠와 드러시크로스 두 집안을 파멸로 이끌기 위해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사랑이 어찌 항상 아름다울 수만 있으랴. 한정서(지우히메 扮)에게 각막을 기증해 주기 위해 자살을 감행하는 한태화(신현준 扮)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이타적인 사랑도 사랑이지만, 상대방을 파멸시킬 만큼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히스클리프의 그것도 사랑의 어떤 한 모습일 것이다. 30살에 요절한 저자는 이 책을 쓰기까지 제대로 된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나 처절하고 어두운 사랑의 면모를 그려낼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그녀는 어떤 사랑을 그리며 히스클리프라는 인물을 빚어낸 걸까.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내가 정말 사랑을 아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한다. 지금의 남편을 사랑하지만, 결코 그를 나 자신보다 사랑하지는 않는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해본 적도, 열렬히 누군가에게 미쳐본 적도, 그로 인해 누군가를 숨 막히게 미워하거나 증오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히스클리프나 캐서린이 너무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어떤 면에선 좀 부럽기도 했다. 그들을 그렇게 미치게 만든 원동력은 정말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정신병은 아닐까..?) 그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파멸시킬 만큼 - 진정 죽음으로 스스로를 내몰 만큼 - 사랑에 진심일 수 있었을까. 내가 모른 채로 죽게 될 그 미지의 감정이 조금은 궁금하기도 하다.


 야, 이 녀석아, 이제 너는 내 거야! 나무를 휘게 할 정도의 강한 바람을 맞고도 이 나무가 다른 나무처럼 휘지 않고 자랄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자!
(에드거의 장례식장에서 히스클리프가 헤어튼을 보며 하는 말)


나는 악당인 저 녀석의 아비가 나를 물고 늘어진 것 이상으로, 저 녀석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고 내가 당한 것보다 더욱 천하게 다루고 있지. 저 녀석은 짐승 같은 야만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난 저 녀석에게 동물과 같지 않은 것은 모조리 어리석고 약한 것이니 경멸하라고 가르쳐주었어....(중략)...

힌들리의 아들놈은 여러 가지 훌륭한 소질을 타고났지만 다 잃어버리고 말았거든. 쓸모가 없기는커녕 그보다도 더 나빠졌어.
(히스클리프가 넬리에게 헤어튼에 대해 설명하는 말)



히스클리프는 결국 모든 복수를 마치고 기괴한 죽음을 맞이한다. 폭풍우가 매섭게 내리치던 날 눈도 감지 못한 채 웃는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허무하고 쓸쓸하게. 나는 그를 그러한 죽음으로 내몬 결정적인 감정이 캐시에 대한 사랑이나 그리움, 혹은 복수를 끝마친 후의 허탈함은 아니었을 것 같다. 캐서린의 조카인 헤어튼이 캐시를 너무도 닮아서 그를 갑자기 사랑하게 됐음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캐서린의 딸에게도 잔인하리만치 폭력적으로 굴었던 그가 아닌가.


그는 헤어튼과 캐시(캐서린의 딸)의 모습에서 자신과 캐서린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캐시로 인해 조금씩 변화해 가는 헤어튼을 바라보며 참을 수 없는 자기 경멸과 후회를 느꼈던 것은 아닐까. 자신보다 더 끔찍한 환경에 놓였음에도 끝내 자신을 지켜낸 - 결국 히스클리프가 파멸시키지 못한 - 헤어튼으로 인해 깊은 좌절감을 맛보았으리라. 어쩌면 그에게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용기도 없고 비겁했던 그는 결국 악마가 되어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처참하게 죽여버렸다. 헤어튼을 통해 히스클리프는 그제야 자기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들여다보게 되었을 것이다.


작가가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으나, 히스클리프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묘한 따뜻함을 느끼기도 했다. 분명 악마를 그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악마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엿보였달까. 그래서 나 역시 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장을 덮기까지 끝끝내 결국 그를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아마도 히스클리프의 사랑과 내가 추구하는 사랑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내가 더 나이를 먹으면 그를 이해하는 날이 오게 되려나...?


2023년 6월 19일, 열여섯 번째 책당모의♥




p.s.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교훈 몇 가지

1.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

2. 사람 말은 끝까지 좀 듣자.

3. 정신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하다.


<발제문> by SSM

1.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계급이 높았던 캐서린과 출신도 알 수 없이 천하게 다뤄졌던 히스크리프의 사랑으로 인한 절망과 복수 그리고 그 자식세대까지 영향을 미친 비극을 그리고 있습니다. 본인이 만약 캐서린이었다면, 계급이 비슷하고 부자였던 린튼을 선택했을까요? 아니면 너무나도 사랑해 왔던 히스크리프를 선택했을까요? 그 이유와 함께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2. 히스클리프는 자신이 사랑한 캐서린이 결혼한 이후 복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결혼한 캐서린을 끊임없이 찾아가고 린튼을 질투하고 위협하며, 결국 그 둘의 결실인 캐서린 린튼을 자신의 아들과 결혼을 시키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해피엔딩은 결혼으로 마무리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곤 합니다.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고 완성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혹은 결혼과 사랑은 어떤 관계라고 생각하시나요? 


3. 이 소설에서는 아내를 잃은 두 남자인 에드가 린튼과 힌들리 언쇼의 이야기가 묘사됩니다. 두 남자는 사회적 계급이 높고, 집안도 비슷하게 잘살며 자신의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졌지만, 아내를 잃고 나서의 둘의 행동은 정말 대조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힌들리 언쇼는 아내를 잃고 나서 술독에 빠져 자신의 아이와 주변인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욕을 일삼는가 하면, 에드가 린튼은 자신의 아내가 자신보다 다른 남자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극히 아내를 간호하고 보살피고, 아내가 죽고 나서도 딸인 캐서린의 교육에 열의를 보이는 모습을 보입니다.

또한 캐서린 린튼은 자신이 사랑하는 린튼 히스클리프가 매우 고집이 세고 이기적인 성품을 가진 것을 알고도, 자신의 아버지와 넬리가 반대함에도 그를 찾아가고 간호하고 그의 곁을 끝까지 지켜줍니다. 고모부인 히스클리프의 폭력과 폭언에도 어린 캐서린일지라도 아주 당돌한 태도를 볼 수 있는 대목이 많았고 나중에 헤어튼 언쇼를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모습도 보여주는데요. 이와 대조되게 헤어튼 언쇼와 린튼 히스클리프는 성미는 아주 고약하지만 히스클리프에게 학대당하고 가스라이팅을 당해 매우 불안정한 모습들을 보입니다.

사람의 천성은 타고나는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환경에 의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환경에 의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 아이 혹은 내 배우자의 나쁜 모습을 발견했을 때,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바꾸실 건가요?


4. 히스클리프의 캐서린에 대한 열정은 집착일까요 사랑일까요? 그가 린튼과 언쇼 집안을 철저히 망가뜨리기 위해 온 생을 다 받쳤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복수에 회의감을 느끼로 “초라한 종말이군, 그래"라는 말을 남기곤 혼자 서서히 꺼져갑니다. 갑자기 그의 복수심이 힘을 잃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5. 이 작품의 웨더링 하이츠 저택과 스러시크로스 저택은 신분의 차이, 혹은 감정의 차이 등 대조적인 모습들이 은유되어 지속 묘사됩니다. 언쇼 가문의 웨더링 하이츠는 히스클리프가 오면서 어떻게 무너졌는지, 그리고 평온했던 스러시크로스 저택은 웨더링 하이츠의 캐서린 언쇼가 들어오면서 어떤 슬픔을 겪었는지, 결국 그의 딸인 캐서린 린튼이 다시 웨더링 하이츠 저택에 가게 되어 비극을 맛보지만, 작가는 히스클리프의 죽음과 캐서린과 헤어튼의 결혼을 통해 다음 세대에서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 세대의 비극을 다음세대의 희망으로 바꾸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6. 이 소설은 영국 문학 작품 중 3대 비극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출간된 시점에는 에밀리브론테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작품 자체가 너무 시대를 앞서갔다는 이유로 오랜 시간 동안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에밀리의 언니였던 샬롯 브론테 역시 제인에어라는 소설로 대중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지만, 처음 출간당시에는 가명으로 본인의 소설을 출간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여성의 인권이 더 이상 핍박받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는 지금, 아직도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꼭 남녀 간의 차별이 아니라도 우리 세대에 겪고 있는 또 다른 차별은 어떤 것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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