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글
처음 뵙겠습니다. 7년 만에 한국어로 글을 씁니다.
나는 지금 스물두 살이다.
어릴 때에는 학교와 집이 너무 싫어서 열다섯 살 때에 집을 나왔다.
한국사회를 빠져나오고 싶어서 옆 나라 일본으로 갔다. 한국을 나오면 일이 잘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일본 사회도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했다. 도중에 전학을 간 일본의 중학교는 불던가요(不登校:후 토우코)였다.
학교를 안 가니깐 성적이 나빠서 편차치(偏差値:헨사치)가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는 못했다. 솔직히 당시에는 한국에서 그럭저럭 공부를 잘했다는 자존심도 있어서 기분이 많이 분했었다.
야간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학교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교에 가기 전에 세븐일레븐의 계산대에 서서 바코드를 찍었고, 여름방학이 되면 노동조건을 무시하는 블랙(브락끄:ブラック)한 아르바이트인 비어 가덴에서 맥주를 날랐다. 27일 연속으로 쉬지 않고 일을 하니깐 고등학생이지만 조금은 저금을 할 수 있었다.
그 돈으로 겨울방학 때에는 배낭여행을 갔다. 뉴욕 7호선 종착역인 플러싱에서 한인이 운영하는 싼 숙소를 찾아 매일 맨해튼까지 한 시간 지하철을 타고 여행을 했다. 뉴욕의 네온사인은 너무 눈이 부시고 내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노숙자도 많이 만났다.
태국도 갔다. 카오산 로드에서 헤나 타투를 받으면서 언젠가는 타투를 받고 싶다고 상상했었다. 스무 살이 된 나는 지금까지 노력해 온 나 자신에 대한 선물과 앞으로의 각오라는 의미를 두고 가슴에 커피에 관련된 타투를 받았다.
배낭여행을 다녀오니깐 여행이 너무 좋아졌다. 일 년 전까지 히키코모리를 했었다는 것이 나 자신도 상상이 안되었다.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학교에 다니면서 게스트하우스에서 청소를 하는 일도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죽어라 영어단어를 외우고 토익점수를 높이기 위해서 말하지도 못하는 영어공부를 했었는데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을 시작하고나서부터 영어를 쓸 기회가 많아졌다. 사실 일본 사람들은 영어를 잘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내가 어른보다 영어단어를 많이 아는 경우가 번번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체크인과 체크아웃의 리셉션의 일도 도와주곤 했다. 224명 중 23등이라는 숫자로 정의되어있던 나의 가치가 새롭게 재정의된 순간이었다.
시간이 흘러서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다니던 고등학교의 선생님이 아침 조례가 끝난 뒤에 나를 불렀다. 해외에 관심이 많고 영어를 공부하는 게 좋다면 국비로 유학을 시켜주는 장학생 프로그램이 있으니 응모를 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응모서류를 작성했다. 결과는 불합격. 하지만 프로그램은 1년에 2번 기회가 있었다. 불합격한 이유를 수정하고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선생님과 면접 연습을 했다. 두 번째 결과는 합격. 유학 장소는 아프리카 가나. 서류상의 지원동기는 국제봉사활동을 통해서 얻은 경험을 장래에 JICA(일본 청년 해외협럭단)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사회에 공헌하고 싶다는 이유. 내 마음속의 실질적인 이유는 국비로 해외에 갈 수 있다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갈 일이 없는 먼 나라에 가고 싶다는 이유였다.
아프리카 가나에서의 경험은 내 시야의 범위를 바꾸었다. 빗속에서 맨발로 축구를 하는 어린이들, 수도인 아크라에는 중국기업이 진출하여 상류층의 삶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년간 아프리카 가나에 있으면 서 장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귀국하고 좋아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고졸로 일을 하는 미래도 좋지만 처음으로 [ 공부 ]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일본에서 자립하기 위에서 필사적이었여서 공부는 잘하지 못했다. 살기 위한 지혜는 있었지만 지식이 부족했다. 대학 수험을 위해서는 그런대로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했다. 고등학교 3학년 후반이 돼서 대학 수험을 결의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귀국 후에 고등학교 은사님에게 진로상담을 했다. 선생님은 팸플릿 하나를 보여 주었다. 일본에서 설립된 지 20년밖에 안 된 국제대학교였다. 이 대학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서 장학금이 많아 준비되어 있었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와 면접으로 입학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수험을 결의했고 국제학부의 미디어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은 매우 자극적인 장소였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 지역성이 강한 일본은 같은 일본인이더라도 출신 현에 따라서 성질이 다양하다. 도중에 코로나 유행이 시작되어서 많은 교류를 하지는 못했지만 너무나 귀중한 시간이었다. 연구도 흥미로웠다. 미디어 학과에 속한 나는 사진론, 보도사진에 대한 연구를 했다. 사진론을 선택한 이유는 아마 어릴 때에 해외를 여행하면서 본 현실을 기록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이 때문이다.
대학에 다니면서 커피숍에서 바리스타 아르바이트도 했다. 커피는 정말로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음료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종종 에티오피아의 커피를 마시면서 아프리카 가나에서 보낸 생활을 기억하곤 했다. 내 대학생활은 커피와 사진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여담이지만 일본에서 와서 처음으로 귀여운 여자 친구도 생겼다. 내 눈에는 엄청 이쁘다.
2022년 지금은 대학교 4학년. 여전히 바리스타로 일을 하면서 졸업논문, 졸업 제작 준비를 하고 있다. 작년부터 KOHII라는 스타트업 기업에서 개발한 커피 애플리케이션에서 크리에이터로 일도 시작했다. 아마 졸업 후에는 KOHII에서 일을 하면서 바리스타를 할 것 같다. 솔직히 불안도 많고 미래도 불확실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떻게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고의 인생도 아니지만 최악이지도 않다. 내 눈앞의 현실은 매우 좋지도 않지만 나쁘지 않다.
일본에는 난 토카 나르:なんとかなる라는 말이 있다. 어떻게는 된다는 말이다.
7년 만에 처음으로 긴 회고록을 써보고 느낀 점은 인생은 어떻게든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는 될 것이다.
7년간의 일을 정리하다 보니 조금 난잡한 문장이 됐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소소한 경험이 국경을 넘은 소통의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이 미숙한 젊은이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