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터전, 그곳에서 써 내려가는 정착기
매년, 그리고 매달 느끼는 것이 있다. 바로 순식간에 흘러가는 시간이다. 2024년을 맞이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름이다. 초겨울 차가운 공기는 어느새 온데간데 사라지고, 정신없이 뜨거운 여름 열기만이 남았다. 나의 일상도 마찬가지이다. 년 초, 수많은 변화에 설레었던 것도 잠시,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조금의 여유를 되찾은 지금, 그동안의 일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일하는 공간의 변화 : 증명에서 인정으로, 나를 받아들이다.
올해 나에게 있어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이직’이었다. 작년 말 나는 7년을 근무한 나의 첫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회사로 출근을 시작했다. 열정페이를 강조했던 전 직장과 달리 새 직장은 나에게 더 좋은 연봉과 환경을 제공했다. 심지어 새롭게 맡게 된 업무 또한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번 직장에는 ‘애증’이 아닌 ‘애정’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대가가 따랐다. 연봉이 높아진 만큼 나는 나의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일 하기에 최적화된 환경 속에서 ‘업무환경이 좋지 않아서’라는 변명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새로운 업무를 수행하며 그동안 가려져있었던 나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빨리 적응을 해야 했다.
모든 것은 쉽지 않았다. 7년 만에 찾아온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그리고 낯선 업무. 올해 겨울, 내가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은 *‘불안’, ‘초조’, ‘두려움’*이었다.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어깨가 짓눌렸다.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실수가 두려워 말이 없어졌고, 의견을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삽질이란 삽질은 다 했던 것 같다. 스스로 남들과 비교하며 조금이라도 뒤쳐질까 봐 전전긍긍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도 힘이 들었다.
그렇게 불안이 극에 다다를 즈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원래부터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럼에도 나는 지금까지 일을 해오면서 적지 않은 성과를 만들어왔다. 생각해 보니 이전 직장에서의 나는 지금과 달리 주변을 비교하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일을 했었다. 그래서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나를 믿고 나만의 페이스로 일이라는 마라톤을 완주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불안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직 후 9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하루하루가 새롭다. 일은 바삐 돌아가고 배워야 하는 것들이 매일같이 등장한다. 업무상 해내야 하는 목표 또한 아직 저 멀리 있다. 그래도 나만의 속도를 찾고 나니 일상에 안정감이 돌아왔다. 이제는 더 이상 초조하지 않다. 매일 나의 가치를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증명해 나가는 중이기에. 그렇게 나의 ‘현’ 직장에 적응하는 중이다.
살아갈 공간의 변화: 임대인에서 집주인으로, 드디어 정착이 시작되다.
여름의 시작과 함께 또다시 이사를 했다. 4년 전 첫 독립 이후 벌써 4번째 이사다. 마지막으로 이사를 한 것이 아직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았기에 피로감이 크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번 이사는 나에게 큰 설렘으로 다가왔다. 그 이유는 이번 이사의 목적이 ‘정착’이기 때문이었다.
독립 이후, 그동안 나에게는 ‘집’이 없었다. 7평 남짓의 오피스텔 ‘방’만이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따뜻한 공간과 누울 자리, 그리고 직주근접의 편의성을 제공해 줬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안정감을 느낄 수 없었다. 문을 열면 주방부터 침대까지 모두 한눈에 들어오는 그 작은 방이 답답했다. 매년 계약일이 돌아올 때면 새 방을 찾기 위해 나도 여느 임차인들처럼 부동산을 전전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좋은 방을 구해도 정이 가지 않았다. 내가 살아갈 ‘집’이 아닌 머물다 떠날 ‘공간’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던 중 나에게도 ‘집’이 생겼다. 거실과 복도, 그리고 3개의 방이 있는 넓은 집에 살게 되었다. 이제는 침대에서 눈을 뜨면 바로 현관문이 보이지 않는다. 집 안에서 방과 방 사이를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 걸음수가 채워진다. 공간의 여유가 생기니 자연스럽게 내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비로소 몸과 마음이 충전되는 나만의 집을 찾았다.
집이 생김과 동시에 나도 ‘집주인’이 되었다. 은행과 함께 소유한 집으로, 비록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은 현관 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제는 이 집에서 나를 쫓아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떠날 걱정 없이 나만의 공간에 마음껏 정을 주고 가꾸어 나갈 수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내 마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든든함이 자리 잡았다.
이사를 한지 벌써 두 달이 되었다. 요즘 나는 나의 애정 가득한 공간 속에서 평온을 찾아가는 중이다. 퇴근 후 집에 들어가면 거실의 아이보리 소파가 나를 반긴다. 그 아늑함 속에 파묻혀 차가운 맥주를 마시자면 따뜻함과 시원함 속에서 하루의 피곤이 녹아내린다. 마치 보이지 않는 응원을 받는 기분이다. 그 응원에 힘입어 삶의 밖과 안, 모두에서 나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한껏 부드러워진 봄바람에도 사정없이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가 떠오른다. 꼭 올해 겨울 끝무렵,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조그마한 바람에도 이리저리 날아갔던 나. 하지만 어느덧 고개를 돌려보면 민들레 꽃은 시멘트 바닥 사이에도 뿌리를 내려 기어코 꽃을 피웠다. 나는 믿는다. 작은 틈 사이에도 자신의 공간을 만든 저 민들레처럼 나 또한 수많은 바람을 타고 결국은 나의 자리에 뿌리내릴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