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충격적인 잠실야구장 덕아웃…>
조수석에 앉아 있던 김형사가 볼륨을 높였다. 박혜진 직장 탐문조사 관계로 이태원 대일기획으로 가는 중이었고 운전은 남형사가 했다.
<미모의 20대 여자로 밝혀졌습니다. 질식사로 보이지만 정확한 사인은 부검결과가 나와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평소 활발하고 직장생활도 원만했으며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가족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자살 쪽에 무게를 두고 수사중이나, 타살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자살에 가깝다고 경찰이 말했다는 데요? 누가 말했지?” 김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남형사는 말없이 운전을 계속했다. 차는 해밀턴 호텔 방향으로 가다 좌회전했다. 둥근 유리벽의 대일기획 빌딩 지하에 주차하고 12층으로 올라갔다. 푹신한 회색 카펫이 깔린 바닥을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박혜진 사망 때문인지 몰라도 사무실 공기는 습하고 무거웠다. 직원 안내로 테이블 2개가 붙어있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팀장이라는 사람이 들어와 인사를 했다.
“일도 빠르고 센스도 좋아 카피라이터로서 크게 될 직원이었는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슬픔을 적절히 드러내면서 담백하게 말을 했다.
“회사에서 인정을 많이 받았나 보네요.”
“일을 아주 잘했어요. 프로젝트 제안 미팅 때 깔끔하게 대응을 잘해 고객사들이 좋아했습니다. 상황별로 대안을 준비해 놓고 고객이 원하는 답을 즉시 내놓으니까 만족할 수밖에 없죠. 그 덕분에 수주도 많이 했습니다. 성실하기도 했고요.”
“직원들 간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두루두루 잘 지냈던 것 같습니다. 정이 많아 동료들과 잘 어울려 다녔고요. 일 잘한다고 거드름 피우지도 않고 같이 도와가며 일하는 친구였습니다. 주위에 힘든 일 있으면 나서서 챙기고 도와주고 그랬어요.”
“최근 일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개인적인 고민거리가 같은 건 없었나요?”
“글쎄요. 그런 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있었으면 표정이 드러날텐데 그렇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박대리가 주도한 프로젝트 결과가 좋아서 얼마나 기뻐했는데요. 아마 한 달 전이었을 겁니다. 광고 때문에 매출이 급성장했다고 고객사에서 따로 선물까지 줬어요. 하여간 제가 아는 선에서는 딱히 고민거리는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고민을 직장에서 내색하기가 어렵지 않았을까요?”
“뭐 그럴 수도 있겠죠. 다른 고민거리가 있었는지는 말을 안 하면 알 수가 없으니까요. 저희 팀에 김주연 대리라고 있는데요, 박대리와 입사 동깁니다. 둘이 친하게 지냈으니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불러 드릴까요?”
팀장은 일어나 조용하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갔다. 노크와 함께 여자 직원 한 명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눈물을 많이 흘린 듯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되었다. 하늘색 블라우스에 짙은 갈색 스커트 차림이었다. 짧은 커트머리에 쌍꺼풀이 짙고 깊었다. 콧날이 칼같이 오뚝해서 만지면 베일 것 같았다. 미인형이었지만 호감을 준다던 지 편해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박혜진씨와 친하게 지냈다고 들었는데요. 직장 생활은 어땠나요?” 남형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혜진이는 성격이 착하고 모질지 못해서 주위에 적이 없었습니다. 팀장님도 얘기했겠지만 상사는 물론이고 동료 직원과도 잘 지냈어요. 일도 잘했고요.”
“최근에 박혜진씨 괴로워하거나 힘들어 하는 모습은 없었나요? 가령 극단적인 선택을 할 만한 그런 정황 말입니다.”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혹시 자살, 맞나요?”
“왜요? 자살이 아닌 것 같아요?”.
“그. 그런 건 아닌데요.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말씀을 하시니까.”
“박혜진씨가 상사에게 인정받고 성격도 좋고 얼굴도 예쁘다 보니 시샘하는 직원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뒤에서 그럴지언정 대놓고 안 좋게 이야기하는 직원은 못 본 것 같아요. 다들 일이 많아서 거의 매일 야근하는데 남 험담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박혜진씨와는 얼마나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습니까?”
“거의 매일 붙어 다니다시피 하며 지냈습니다. 아마 학교 친구보다 더 친했을 거예요. 모든 것 다 숨김없이 이야기 다하는 사이였으니까요. 가족 이야기까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직장 동료라기 보다 친한 친구였어요.” 김주연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사망 전날, 그러니까 그제 회사에서 박혜진씨가 특이한 행동이나 말을 한 적은 없었어요?”
“그날따라 바빠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서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참, 5시 좀 넘어서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했던 것 같네요. 사무실 복도에서 봤거든요.”
“누구와 통화했는지, 무슨 내용인지 아세요?”
“제가 그때 퇴근 전까지 중요한 메일을 보내야 해서 물어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남자 관계는 어땠어요? 만나는 남자 있었습니까?”
“남자요? 만난다는 얘기 못 들었어요. 남자가 생겼다면 말을 안할 친구가 아닙니다. 사귀는 남자 없었을 거예요.”
이후 직원 2명을 더 만나봤으나 주목할만한 진술은 나오지 않았다.
경찰서로 복귀해 회의실에서 김형사가 CCTV 분석 결과를 설명했다. 팀장은 서장의 긴급 호출로 자리를 뜨면서 남형사와 먼저 진행하라고 했다.
“사망 시간대 전후로 한정해서 봤습니다.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요. 야구장이다 보니 사람들도 많고 화질도 선명하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거기다 밤 12시 되면 야구장 내 메인 전등은 전부 소등하고 미등만 남긴답니다. 미등 아래에서는 CCTV가 선명하지 않아 12시 이후 화면은 희미해서 누군지 거의 구별이 안되더라고요.”
“CCTV는 별 도움 안 되겠네. 특이사항만 말해줘.”
“12시 이후엔 청소원이나 운동복 차림의 사람이 한 두 명 보이는데요. 희미해서 누군인지 식별이 어려웠습니다. 경기가 10시30분쯤 끝났다고 해서 그때부터 12시 사이를 주목하고 봤습니다. 이 시간대는 선수, 구단 관계자, 야구팬 등 사람들이 뒤섞여 얼굴 식별이 쉽지 않았습니다. 체형이나 옷 모양을 보고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형사가 정지된 영상 화면을 띄웠다. 여자 한 명이 복도로 들어 가려 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11시 7분에 찍힌 화면입니다. 3루 덕아웃 복도로 들어가기 직전 상황인데요, 머리 스타일이나 복장이 박혜진하고 같습니다.”
남형사가 수첩을 찾아 뒤적이며 말했다. “잠시만 보자.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 회색 재킷, 검은 바지에 하이힐 차림이니 얼추 맞는 것 같네. 근데 박혜진 같은 일반인이 저 복도로 들어갈 수 있어?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쓰여 있었던 것 같은데?”
“경기 중에는 구장 직원이 확인하기 때문에 들어가기 힘들고요. 경기 전후에 선수들이 가끔 가족을 데리고 들어가기도 한답니다. 골수 팬들은 몰래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박혜진이 골수 팬은 아닐테고, 선수나 구단 관계자 중 지인이 있나?”
“구단에 문의해봤는데 박혜진을 아는 직원은 없다고 합니다. 선수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합니다. 알고 있다면 먼저 연락을 했을 거라고 하면서요. 그냥 몰래 들어간 게 아닐까요?”
“아무 연고도 없는 20대 여자가 밤 11시에 야구장에 몰래 들어가서 시신으로 나온다고? 말이 안 되잖아. 몰래 죽으러 들어간 것도 아니고 말이야. 사망 시각 이후에는 별다른 것 없었고?”
“1시 이후는 인적이 거의 드물었고 희미한 미등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청소원 복장이나 운동복 차림의 사람 정도 확인이 됐습니다. 1시30분 이후는 인적이 아예 없었고요.”
“운동복 차림의 남자라면 야구선수?”
“그게 좀 예매한데요. 운동복은 선수, 구단관계자, 관중이나 팬 누구나 다 입고 다니는 거라.”
“몇 시에 찍혔는데?”
”1시5분에 복도로 들어가다 찍혔는데 나오는 모습은 찍히지 않았습니다. 안에서 자고 갔을 리는 없고 아마 다른 출구로 나간 듯합니다.”
“사망 시간대와 비슷하기도 하지만, 그 시간에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도 이상해. 어디로 나갔는지 다른 쪽 CCTV도 찾아봐야 할 것 같아.”
“다 찾아보려면 시간은 좀 걸리겠네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사망 전날 박혜진과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사람 말인데요. 계속 전화했는데 연결이 안 되더라고요. 문자까지 남겼는데요.”
“아직도? 번호 불러봐. 내가 직접 해 볼 테니. 부검결과는 언제쯤 나온대?”
“1차 부검 결과는 월요일 오전에 준답니다. 증거물 감식결과도 그때 나오고요.”
회의실을 나온 남형사는 마지막 통화자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자 문자를 보내고 일어났다.
K 산부인과는 역삼동 국기원 인근 10층 건물에 있었다. 2개층을 제외한 전체 건물에 크고 작은 병원들이 입주해 있었다. 의사는 50대 초반의 여자였다. 가운이 작아 보일 정도로 상체가 두터웠고 위로 올라간 눈꼬리, 짧은 목에서 강인함이 묻어났다. 사망한 박혜진이 무슨 일로 다녔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그 환자 기억 납니다. 젊은 나이에 참 안타깝네요. 근데 규정 상 환자에 관한 정보는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경찰이라 하더라도요.”
“사건을 최대한 빨리 해결하는 것이 고인이나 유족을 위하는 길입니다. 세세한 기록까지는 필요 없고 무슨 일 때문에 왔는지만 알려주시면 좋겠는데요. 협조 부탁드립니다.”
“힘들 것 같습니다. 윤리적인 측면을 봐서라도 말씀드리면 안 될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형사님.”
“지금 협조를 안해주시면 수색영장 발부해서 다시 와야 하는 수가 있어요. 그땐 무차별적으로 뒤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료기록부터 처치 내역, 약물 대장, 회계 장부 모두 다요." 의사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체념한 듯 표정을 풀었다.
“이러면 안 되지만 어차피 수색영장 나오면 알게 될 것 같으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의사는 모니터에서 기록을 보며 말을 이었다. “4주전에 처음 왔었는데, 임신 8주였습니다. 그 이후 두 번 내원해서 진료 봤었고요. 내일 진료예약 건은,” 의사는 순간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태아 초음파 검사 때문이네요.”
“아니 임신이라고요? 그 때가 8주면 지금은 12주쯤 되잖아요. 그 정도면 외형상으로 표시가 나지 않습니까?” 병원 검안의가 임신했다는 말은 하지 않아 남형사는 당황했다.
“그건 산모에 따라 차이가 많아요. 임신초기에는 더 그렇고요. 임신 5개월 넘어 원피스를 입어도 표시가 안 나는 산모도 많습니다.”
경찰서에 도착해서 사무실로 올라가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송파경찰서 형사님 되세요? 문자보고 전화했습니다.” 박혜진이 사망 전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사람이었다. 남자였다.
“아, 네 맞습니다. 이제서야 통화가 되네요. 저희가 몇 번이나 전화하고 문자도 남겼는데.”
“미안합니다. 하는 일이 그렇다 보니 바로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뭣 땜에 그러신지요?”
“사건 때문에 확인할 게 있어서요. 사망 사건입니다. 사망자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선생님과 통화를 했더라고요. 그저께 수요일에요.”
남자는 잠깐 침묵 후 말을 이었다. “수요일이면 잠실에서 경기가 있었는데, 혹시 사망한 사람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박.혜.진. 입니다.” 천천히 또렷하게 남형사가 이름을 불러 주었다.“박혜진요? 혜진이가 죽었단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