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송파경찰서 강력팀 회의실, 테이블 가운데 송팀장, 좌우에 남형사, 김형사가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 모서리가 라운드 처리되어 위압감은 없었지만 곳곳에 상처투성이였다.
남형사가 추가로 파악한 사실을 핵심 위주로 보고했다. 먼저 CCTV 분석 결과부터 시작했다. 당일 밤 11시 넘어 3루 덕아웃 방향 복도로 들어가는 박혜진이 확인되었다. 1시경 수상한 남자가 찍혔으나 누구인지 식별이 불가능 했다. 팀장이 별 언급이 없자 국과수 부검으로 넘어갔다. 타살 흔적이 없는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이고 임신 3개월 상태였다는 소견이었다.
팀장은 임신한 여자의 자살이라는 사실에 놀란 듯하다가 극한 상황에 몰리면 그럴 수 있을 수도 있다며 상황을 인정했다.
“자살이라 하더라도 정황상 계획적인 게 아니라 우발적인 자살로 보여집니다. 이런 경우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이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죠. 박혜진은 그런 질환을 앓았던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건강한 여자가 뜬금없이 야구장 가서 자살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도 임신한 상태에서. 유서도 없이요.” 남형사가 반박하듯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자살하면서 유서를 남기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긴 하잖아. 사망 전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사람 신원은 확인됐어?” 팀장은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이경수라는 남자로 프로야구 선수더라고요. 피닉스팀 주전으로 뛰고 있고요. 박혜진과 고등학교 동창이었는데, 친하게 어울리다가 졸업하고 나서 연락이 끊겼답니다. 그러다 1년전에 우연히 만나 가끔 연락하고 지내던 사이였다고 합니다. 사건 당일 전화도 단순 안부 전화였다고 하고요.”
“피닉스라면 팬이 많기로 소문난 팀 아냐? 그런 팀의 주전선수가 박혜진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라고? 혹시 그날 피닉스 경기 잠실에서 있었어?”
“네 맞습니다. 피닉스가 원정 팀이라 3루 덕아웃을 사용했습니다. 박혜진 시신이 발견된 곳요. 저희도 이경수 알리바이를 주목해서 탐문했는데 아직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경기 끝난 후 11시30분쯤 야구장을 나와 팀 동료들과 인근 식당에서 밥을 먹었답니다. 팀 동료, 식당 주인과 통화를 했는데 사실이더라고요.”
“통화만 하지 말고 발로 좀 뛰어. 동료 선수도 만나보고 식당도 직접 가 봐야지. 대면해서 이경수의 행동에 특이사항이 없었는지 확인해봐야 할 것 아냐.”
“프로야구 시즌 중이라 시간 잡기가 쉽지 않네요. 빨리 만나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경수 말 대로 박혜진과 단순 친구 사이인 것 맞아? 둘 사이에 치정 같은 것이 엮여 있었던 것 아냐? 통화기록에 뭔가 나온 게 없어?”
“올 1월부터 사건 발생일 전까지 5개월 동안 이경수 통화기록을 봤는데요. 이경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둘 사이에 통화는 11건뿐이었습니다.” 김형사가 수첩을 들쳐 보며 답을 했다.
“경기 후 이경수가 야구장에서 나왔다는 시간. CCTV 통해서 확인해봤어?”
김형사가 CCTV 녹화 파일을 열려는 듯 마우스를 쥐었다.
“일일이 띄우지 말고 결과만 간략히 말씀드려.” 남형사가 볼멘소리로 끼어들었다.
“11시 38분에 3루쪽 복도 출구 앞에 있는 CCTV에 찍혔습니다. 혼자 황급히 걸어가는 모습인데 다른 일행보다 늦게 나가서 그런 듯합니다.”
“CCTV상으로는 박혜진, 이경수가 야구장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 그런데 이경수는 팀 동료들과 같이 식당에 갔다 했는데 CCTV에는 왜 혼자 나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주차장에서 만나 같이 식당으로 간 게 아닐까요? 동료 선수 만나서 확인해보겠습니다.”
“나오는 도중에 이경수가 박혜진을 만났는지도 같이 물어 봐.”
“통화할 때는 누굴 만났다는 말은 없었는데. 네 물어 보겠습니다.”
“정리해보면, 부검 결과는 자살이지만 자살동기는 미흡해 보인다는 거잖아. 이경수에게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고.”
“네 그렇습니다.”
“팀 동료 빨리 만나보고 박혜진 주변도 좀 더 조사해봐. 다들 알겠지만 언론 장난 아니게 시끄러워. 지금도 말도 안 되는 추측 기사가 넘쳐나는데 시간 끌수록 화살은 우리한테 올 게 뻔해. 서둘러서 빨리 결론 냈으면 좋겠어. 이번 주 안으로 뭔가 가시적인 결과가 나와줘야 돼.”
“두 분은 이경수씨와 비슷한 또래 같은데 동기인가 보네요?” 잠실야구장 인근 카페에서 팀 동료 두 명과 만나는 중이었다.
“제가 이경수와 입단 동깁니다. 이 친구는 1년 후배인데 경수와 함께 친하게 지내는 편입니다. 혹시 경수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건가요?”
포수처럼 덩치 좋은 남자가 긴장한 듯 목소리가 떨렸다. 후배는 날렵한 몸이 내야수 같아 보였다.
“연루됐다기보다 몇 가지 확인이 필요한 게 있어서요. 저번 주 목요일 잠실야구장에서 여자 시신 발견된 것 알고 있죠? 그 사건 관련 수요일 밤 이경수씨 행적을 확인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날 경기 끝나고 집으로 갈 때까지 같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맞나요?”
“그날은 경기가 조금 늦게 끝났습니다. 아마 10시 30분 전후였을 겁니다. 라커룸에서 짐을 정리하고 주차장으로 나왔을 때 대략 11시 20분. 그쯤 됐을 겁니다. 경수는 같이 나오다가 도중에 빠트린 게 있다고 라커룸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식당에서 보자고 하고 저희 둘이 먼저 출발했고요. 선릉역 근처 감자탕집인데 자주 가는 단골집이 있거든요. 경수는 20분쯤 뒤인 12시경에 식당으로 왔습니다. 거기서 2시 좀 넘어서 끝났을 겁니다.” 포수가 깔끔하게 정리해서 말을 했다. 같이 나오는 도중 복도에서 어떤 여자를 만났느냐고 물었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고 답했다.
“감자탕집에서 나와서 헤어진 시간이 정확히 몇 신지 기억납니까? 계산은 누가 했어요?”
“그날 제가 계산했는데, 카드 긁은 시간을 보면 정확할 것 같네요. 계산 후에 바로 대리기사 왔거든요. 잠시만요, 카드승인 시간 한번 보겠습니다.”
포수가 핸드폰으로 카드사 앱을 실행시켰다. “있네요 여기. 2시 13분입니다.”
“세 분이 계속 감자탕집에 같이 있었던 건 맞아요? 마지막 계산할 때 까지요. 중간에 누가 잠시 나갔다 온 적은 없었습니까?” 남형사가 내야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그게, 잠시 자리를 비운적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요.” 내야수는 포수를 곁눈질하며 말을 했다.
“누가요? 본인이 자리를 비웠단 말입니까?”
“아니 전 당연히 계속 자리에 있었죠. 자리를 비운 건 경수 선배였습니다. 12시 3,40분쯤이었나? 친구가 근처에 왔다고 잠시 갔다 오겠다고 하고 나갔습니다. 대략 30분정도? 아니다 30분은 넘은 것 같네요. 빨리 안 와서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던 기억이 납니다.”
“12시40분부터 30분이라면 다시 돌아온 시간은 1시10분 이후가 되겠네요. 정확한 시간은 CCTV 확인해보면 될 것 같고, 오늘 두분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둘이 나간 뒤 남형사는 김형사에게 업무 지시를 내렸다.
“선릉역 감자탕집 가서 CCTV 확보해서 이경수 알리바이 확인해줘. 빨리 안 가면 녹화 테이프 삭제될 수도 있으니까 지금 바로 가봐야 돼. 이경수가 중간에 30분 이상 자리를 비웠다면 뭔가를 하기에 부족한 시간은 아니야. 물론 상황에 따라 빠듯한 시간일 수도 있지만.”
“저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경수는 팀 동료랑 밥 먹었다고만 했지 중간에 자리를 비웠다는 말은 안 했잖아요.”
남형사는 김형사와 헤어져 박혜진의 직장인 대일기획 2층 라운지에서 김주연을 만났다. 박혜진과 이경수의 관계에 대해 탐문했는데 별 소득이 없었다. 김주연은 이경수를 박혜진 동창이라고 알고 있었다. 박혜진으로부터 최근에 둘이 만났다고 들은 적도 없다고 했다. 박혜진 오빠에게도 전화를 했지만 김주연과 같은 대답을 했다.
박혜진과 이경수. 최근에 둘이 분명히 만났을 것 같아. 만나서 어떤 감정이 생기고 어긋나고 충돌하는 지점이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안 그러고는 밤 늦은 시간에 연고도 없는 야구장에 박혜진이 나타날 리가 없지.
경찰서로 복귀하니 김형사는 컴퓨터 모니터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남형사는 모니터 위를 톡톡 쳤다. 김형사가 고개를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앗 오셨네요.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김형사가 인쇄물을 들고 남형사 자리 옆으로 와서 앉았다. 엑셀로 만든 시간대별 일정표를 보여주며 말을 시작했다.
“감자탕 집 CCTV 녹화 뜬 거 정리한 건데요. 팀 동료가 말한 게 거의 맞더라고요. 11시 40분 조금 넘어서 동료 2명이 먼저 식당으로 들어왔고, 이경수는 12시5분에 들어왔습니다. 중간에 이경수는 12시41분에 식당을 나가 1시32분에 다시 왔습니다. 51분 동안 자리를 비웠던 셈입니다.”
“51분이라, 그 정도면 야구장 갔다 오기에 충분한 시간 같은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경수를 불러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좀 전에 야구장 청소원한테 제보 전화 왔습니다. 밤 1시 좀 넘어서 야구장 안에서 이경수 비슷한 남자를 목격했다는데요. 3루쪽 덕아웃 방면 복도 앞에 서성이길래 유심히 봤답니다. 거리는 약 10미터 되고요. 희미하게 비치는 얼굴이 이경수와 흡사했답니다. 거기다 불사조 마크가 새겨진 피닉스 모자를 쓰고 있었고요.”
“다가 가서 말은 안 했대? 밤 늦은 시간이었잖아.”
“일반인이라면 당장 가서 말을 했을 거랍니다. 근데 운동복 차림에 이경수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았다고 하네요. 시합 후에 개인 훈련을 하고 늦게 가는 선수가 가끔 있어서 그러려니 했대요.”
“그 정도 거리에서 본 걸 가지고 이경수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직접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어두운 실내에서 희미하게 봤을 텐데 어떻게 단박에 이경수 라고 단정 지었대?”
“저도 처음에는 의심스러웠는데 말을 듣고 보니 설득력이 있더라고요. 청소원의 딸이 이경수 팬이라 사인도 받아준 적도 있고 해서 잘 안답니다. 무엇보다 남자 등에 새겨진 번호를 보고 확신했다고 합니다. 멀리서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남자가 몸을 돌렸는데 등에 ‘32’ 라는 숫자가 보였대요. 이경수 등번호가 32번이거든요. 목 뒤에 모자 달린 후드티였고요.”
“후드티라고? CCTV 속 운동복 차림의 남자, 그 사람이 찍힌 장소와 청소원이 목격했다는 장소가 일치하는 것 같은데?”
“맞습니다! 3루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복도 앞이요. 그러고보니 복장도 똑같네요. CCTV 속 남자도 후드티였으니까.”
“CCTV속 남자와 청소원이 목격한 남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건데, 문제는 그 사람을 이경수라고 할 만한 명확한 증거가 없어. 목격자 증언은 허점이 많아 공격당하기 쉽고, CCTV가 확실한데 화질이 안 좋으니 기대하기 어렵게 됐잖아. 32번. 이경수 등번호라는 말이지?”
“혹시나 해서 봤는데 상대팀 선수 중에서도 32번은 없었습니다. 그날 잠실야구장에 있었던 선수 중 32번은 이경수 한 명이라는 겁니다.”
남형사는 미간을 좁히며 골몰히 생각 하더니 말을 했다. “사건 현장에서 김형사가 발견한 장갑 말이야. 거기에 숫자가 박혀 있다고 하지 않았어? 내 기억으로는 32번이었던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