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가 심하네" 조수석에 있던 네가 말했다. "다른 세계로 넘어온 것 같아" 내리막길에서 속도를 줄이며 내가 말했다. 해수욕장에 가까워질수록 하얀 입김이 짙어졌다. 백사장은 발 디딜 때마다 푹푹 꺼졌다. 밀려온 파도가 모래성을 먹어 치웠다. 모든 노력이 흔적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늘 아니었다. "이제 다른 거 할 거지?" , "이거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우리의 이해는 하루가 다르게 멀어졌다. 사랑을 벗어난 얼굴은 지쳐 보였다.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헤집던 손은 더 이상 안부를 묻지 않는다.
수면에 일어나는 파문이 초록으로 변할 때, 옷은 몸을 입고 산을 오른다. 나무와 나무, 햇빛과 그늘, 흙과 바위. 정상까지 한참 남았는데 흐느적거리다 주저앉으면, 투명하게 여문 손톱 아래 여러 겹의 여전한 슬픔이 떠오른다. 유리로 만든 우아한 펜을 잡고 버둥대다가 받은 전화, 나지막이 내뱉던 음성과 눈물과 호흡과 축하와 맑은 날씨.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신다. 물을 마셔도 갈증이 난다. 아슬하게 쌓여있는 돌탑은 언젠가 무너질 것 같은데, 전망대에서 경치를 감상하고 내려오는 사람들은 여유가 넘친다. 애쓴 모든 것들이 엎질러져 한 발 잘못 디디면 낭떠러지인 곳에서 공허한 메아리가 멱살을 잡고 흔들면, 금이 간 나를 떠난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어 진다. 서로의 웃음이 마주하던 최고의 순간이 같은 자리에서 소용돌이치면, 떼 지어 출몰하는 감각들, 감당하지 못해 산산조각 난 나는 너의 온도를 껴안고 싶어 미칠 것 같은데,
"이렇게 심한 안개는 다시 보기 힘들 거야" 너는 모래 위를 날아갈 듯 뛰어간다. "이런 날도 색다르고 맘에 들어" 나는 눅눅한 모래를 움켜쥔다. "우리 지금 얼굴도 제대로 안 보이는데, 이게 어떻게 좋은 날이야" 너는 갈수록 희미해진다. "걱정 마, 눈 코 입 제자리에 잘 붙어 있어" 나는 눅눅한 미래가 된다. "그래, 그렇게 내 옆에 붙어 있으면 돼" 너는 안 보이고 목소리만 들린다. "알았어, 이제 돌아가자, 어디 있는 거야" 나는 끝에서 끝을 맞이한다.
새소리 물소리, 풀꽃 냄새, 알록달록한 사람들. 말랑한 바람이 분다. 하얀 구름이 옅어진다. 우리의 이해가 사라진다. 우리가 사라진다.